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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경영

마블, 스타워즈, 픽사 모두를 품은 리더, 디즈니만이 하는 것 - 로버트 앨런 아이거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출처: Google)

시작하며: 지난 15년간 디즈니를 이끌며 내가 배운 것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내 안에서는 일종의 본능적인 심사, 선별 과정이 개시된다. 내 나름의 내적 ‘위협 저울’에 올려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중단해야 하는 사건이 있지만, 다음과 같이 평가해야 하는 사건도 있다. ‘이것은 심각하다. 조치를 취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우선은 다른 더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다음에 이 문제를 해결한다.’ 때로는 ‘책임자’라 하더라도 자신이 추가로 개입할 필요가 없는 상황도 있다. 그런 경우 직원들이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믿고 맡기며, 자신의 에너지는 다른 현안에 집중시키는 것이 현명한 처사다.

 

월트디즈니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기업, 조직도 마찬가지다. 항상 일이 생긴다. 이 책의 주제 역시 가장 간단하게 말하자면, ‘좋은 일은 잘 키우고 나쁜 일은 잘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련의 원칙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오랫동안 그런 것에 대해 글을 쓰기를 꺼렸다. 아주 최근까지도 ‘나의 리더십 원칙’이나 그와 비슷한 아이디어를 밝히는 것조차 피했다. 내가 그것을 완전하게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45년 넘게 한 분야에서 일했고 특히 지난 14년간 CEO로 재임해보니, 내 경험을 넘어서는 부분에 대해서도 독자들에게 유용한 통찰을 갖게 되었다는 확신이 생겼다.

 

내가 배운 5가지의 원칙

  1. 리스크를 감수하고 창의성을 장려하는 것.
  2. 신뢰의 문화를 구축하는 것.
  3. 자신에 대한 깊고 지속적인 호기심을 배양해 주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것.
  4.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
  5. 항상 정직하고 고결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그럼으로써 힘겨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 분명할 때조차도).

 

리더십의 10가지 대원칙

다른 이들을 이끄는 리더십 (출처: Unsplash)

낙관주의

‘달성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실용적인 열정’이다. 어려운 선택과 기대 이하의 결과에 직면하더라도 낙관적인 지도자는 비관론에 굴복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은 비관론자에게서 동기를 부여받거나 활력을 얻지 못한다.

 

용기

진정한 혁신은 오직 용기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나온다. 이는 인수와 투자, 자본할당 같은 상황에도 해당된다. 특히 창의적인 의사결정에 용기는 필수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늘 창의성을 파괴한다.

 

명확한 초점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전략이나 문제, 또는 프로젝트에 시간과 에너지, 자원을 할당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우선순위를 자주, 명확하게 알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결단력

아무리 어려운 결정이라도 시의 적절하게 내려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없는 결정이란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리더는 견해의 다양성을 장려하되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호기심

깊고 지속적인 호기심은 새로운 사람들과 장소, 아이디어를 발견하게 하고, 시장과 그 변화하는 역학에 대한 이해도 돕는다. 혁신의 길은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공정성

사람들을 공정하고 품위 있게 대하는 태도가 겸비되어야 진정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공감능력은 사람들이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하는 태도와 마찬가지로 필수적이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반성했다면, 그에게는 마땅히 두 번째 기회를 주어야 한다.

 

사려 깊음

사려 깊은 태도를 가진 사람은 지식과 정보를 수월하게 얻고, 의견을 제시할 때 더욱 신뢰받는다. 또한 좀 더 정확하게 의사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 사려 깊은 태도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쉬운 방법은, 무언가 의견을 주장할 때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견해를 개발하고 숙고해 다듬는 것이다.

 

진정성

어떤 것도 조작해서는 안 된다. 진실과 진정성은 존중과 신뢰를 낳는다.

 

완벽주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완벽을 추구하라는 뜻이 아니다. 평범함을 거부하라는 의미다. 무언가가 ‘웬만큼 좋다’고 변명하지 말아야 한다. 무언가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에 걸맞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당신이 무언가를 만드는 비즈니스에 몸담고 있다면, 그것을 최고로 위대하게 만들어야 한다.

 

고결함

어떤 기업이든 품질과 고결함, 이 2가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여기서 말하는 ‘품질과 고결함’이란 구성원과 제품 모두에 해당한다. 회사의 성공은 크고 작은 모든 사안에 대해 높은 수준의 윤리적 표준을 적용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어떤 업무든 그것을 수행하는 방식이 다른 모든 것을 수행하는 방식과 똑같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고결함이다.

 

 


Part 1. 배우다 Learning

1. 바닥에서 시작하다

오늘날까지 나는 거의 매일 새벽 4시 15분에 일어나는 생활을 이어왔지만, 지금은 순전히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다. 하루의 과업을 수행하기 전에 사색하고 독서하고 운동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일상적으로 그런 시간을 가지면 일의 중압감에서 잠시 벗어나 생각을 좀 더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다. 훨씬 더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할 수 있고, 상황을 뒤집어볼 수도 있다. 그래서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다. 이메일과 문자메시지, 전화통화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새벽 시간이 없다면 나의 생산성과 창의성도 그만큼 떨어질 것이다.

 

역각도reverse-angle 카메라와 슬로우모션 재생, 위성 생중계 등이 바로 룬이 방송에 도입한 첨단기술이었다. 그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모든 새로운 도구를 시험하고 모든 진부한 형식을 깨부쉈다. 그는 언제나 시청자에게 관심을 끌고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룬이 내게 준 금언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후 내가 맡은 모든 직무에 길잡이가 되었다. ‘혁신 아니면 죽음이다. 새로운 것이나 검증되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면 혁신은 없다.’

 

룬에게는 너무 사소해서 무시해도 좋은 세부사항이라는 게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완벽은 모든 사소한 것들을 바로 잡아서 얻어내는 결과였다.

 

내가 룬에게서 배운 모든 것 중,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리더십의 특질 중 하나인 이것을 나는 ‘완벽에 대한 집요한 추구’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이것은 수많은 의미를 담고 있어서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특정한 규칙의 집합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내면화한 바로 그것은 ‘어떤 것을 희생하더라도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완벽주의’가 아니다(룬은 그런 완벽주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평범함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의욕이 없어서’, ‘그러려면 곤란한 대화를 나눠야 해서’ 같은 핑계를 먼저 댄다. 그러면서 ‘그저 적당한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이만하면 괜찮지’ 하며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많은 방법을 동원한다.

 

나는 ‘그는 아니오라는 대답을 거부한다’는 사람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했다. 그가 만약 당신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요구했다면, 그것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 그 일을 완수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뜻이었다. 당신이 돌아가서 시도했지만 완수할 수 없었다고 말하면, 그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세요.”라고 답할 것이다.

 

직장생활에서든 개인의 삶에서든, 정직하게 실수를 인정하면 주변 사람들이 당신을 더욱 존중하고 신뢰하게 된다. 살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실수를 인정하고, 실수에서 배우고, 때로는 실수를 해도 괜찮다는 본보기가 되는 것은 가능하다. 용인할 수 없는 것은 거짓말하거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행태다.

 

너무나 간단명료한 교훈이라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희귀한 행동방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존중하라’는 교훈이다. 모든 사람을 공감하는 자세로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기대치를 낮추거나 실수가 중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당신이 사람들의 말을 끝까지 들어줄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일관되고 공정하며,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두 번째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느끼는 환경을 조성하라는 뜻이다(만약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덮어씌우거나 비윤리적인 행동방식에서 실수가 비롯된 경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용인해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 내가 다른 누구보다 일을 더 열심히, 더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룬의 기분에 휘둘리는 대신 내가 하는 일과 내가 몸담은 직장의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는 룬의 ‘완벽 추구’에 동기를 부여받았고, 이후 그것을 나의 신조로 삼아왔다. 하지만 나는 그 과정에서 다른 것도 배웠다. ‘탁월함excellence과 공정함fairness은 서로 배타적일 필요가 없다’는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2. 인재에 투자하다

우리의 경력과 삶에는 분명 변곡점 같은 순간이 존재하지만, 그런 순간이 매번 그렇게 명백하게, 또는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내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건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내가 아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 필경 더 안전하긴 할 터였다. 하지만 나는 또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거나 데니스와 관련해서 내가 모종의 우월감을 느꼈다는 것과 같은 이유로, 너무 충동적으로 회사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기어코 떠난다면, 그것은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대단한 기회가 생겼을 경우여야 했다.

 

톰과 댄은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절제가 필요한 수준의 야욕도 없고 거만함도 없고 거짓도 없는, 항상 진실한 사람들이었다. 누구와 대화를 나누든 일관되게 정직하며 솔직한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상황판단이 빠른 사업가였지만(워런 버핏은 나중에 그들에 대해 “경영계에서 이제껏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나올 일이 없을 최상의 콤비”라고 평가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서 진정한 예의범절과 직업적 경쟁력이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님을 배웠다. 실제로 진정한 고결함(자신의 참모습을 알고, 옳고 그름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바탕으로 처신하는 자세)은 일종의 비밀병기다. 그들은 자신들의 본능을 믿고 주위 사람들을 존중했으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스스로 삶의 신조로 삼아온 가치들을 회사 경영에도 반영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업전략은 매우 단순했다. 비용관리에 고도로 주의를 기울이면서 중앙집권형이 아닌 분산형 조직의 가치를 믿었다. 모든 핵심적인 결정을 반드시 최고위경영진이나 본사의 소규모 전략가들이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은 똑똑하고 품위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고용해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앉혔고, 대신 자율성을 보장하며 일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직원들이 항상 쉽고 편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시간을 엄청나게 후하게 내주었다. 때문에 경영진을 비롯한 구성원 대부분이 그들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언제나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낙관주의가 절실한 순간이었다. 상황은 확실히 끔찍했지만, 나는 그것을 재앙이 아니라 풀어야 할 퍼즐로 보고 우리 팀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멋진 무언가를 도출해낼 만큼 재능 있고 민첩하다는 점을 모두에게 인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매 순간이 아슬아슬한 줄타기였지만 재미도 있었다. 그리고 상황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주변 사람들을 최대한 평온하게 대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매일의 도전을 맞이하는 일은 만족스럽기도 했다.

 

 

3. 모르는 것은 배우고 행하는 것은 믿는다

첫 번째 규칙은 그 무엇도 허위로 가장하지 않는 것이다. 겸손해야 하며 다른 사람이 된 척하거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또한 리더의 위치에 있으므로 영令이 서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겸손한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 선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이제껏 내가 이 교훈을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그 점에 있다. 물어볼 필요가 있는 것은 물어보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인정을 하되, 사과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서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을 가능한 한 빨리 익히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지식을 가진 것처럼 가장하는 행태보다 더 신뢰감을 떨어뜨리는 것은 없다. 진정한 권위와 리더십은 스스로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가장하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다.

 

내가 LA에 도착한 것은 1989~1990 시즌의 황금시간대 라인업에 대한 최종결정을 6주 남겨둔 시점이었다. 사무실에 출근한 첫날, 내가 읽어야 할 40편의 대본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매일 저녁 나는 그것들을 집에 가져와 의무적으로 읽어나가며 여백에 메모를 하곤 했다. 하지만 그 대본들이 어떤 식으로 화면에 구현될지 상상하는 데는 애를 먹었다. 그러다 보니 좋은 대본과 나쁜 대본을 판단하는 나의 능력에도 의문이 갔다. 내가 지금 적절한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나? 다른 사람들 눈에는 빤히 보이는 어떤 것을 내가 완전히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처음에는 ‘역시 그렇다’였다.

 

나는 톰에게 전화를 걸어 ‘트윈 픽스’를 예정대로 방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무렵 이미 할리우드 안팎에서 우리가 추진하는 그것에 대한 입소문이 무성하게 나돌고 있었다. 심지어 〈월스트리트 저널〉 1면에 ABC의 고지식한 임원들이 막대한 창작 리스크를 감수하고 있다는 기사까지 나갔다. 그러자 갑자기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와 조지 루카스George Lucas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영화 ‘후크Hook’를 감독하느라 한창 바쁜 스티븐을 만나기 위해 세트장을 찾아갔고, 조지를 만나러 스카이워커랜치Skywalker Ranch도 방문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ABC에서 무언가를 해볼 수 있을지 나와 논의하고 싶어 했다. 그런 세계적인 수준의 영화감독들이 TV 드라마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트윈 픽스’를 제작하기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발상이었다(실제로 2년 후인 1991년, 조지 루카스가 만든 ‘젊은 인디애나 존스 연대기Young Indiana Jones Chronicles’가 ABC에서 두 시즌 동안 방영되었다).

 

데이비드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탁월한 영화제작자였다. 하지만 TV 시리즈 PD는 아니었다. 연속극을 제작할 때는 원칙에 따라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대본을 제때 전달하고, 스태프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며, 모든 것을 일정대로 진행시키는 것과 같은 원칙과 규율 말이다. 데이비드에게는 그런 규율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스토리텔링에도 나름의 규율이 요구된다. 영화는 2시간 동안 관객들에게 좋은 경험을 주고 만족감을 느끼며 돌아가게 만들면 된다. 하지만 TV 시리즈는 다르다. 매주, 매 시즌 사람들이 계속 되돌아오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지금도 데이비드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그의 작품을 영원히 경외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TV 시리즈 PD로서의 감성이 없다는 사실은, 결국 ‘도가 지나친 열린 결말’이라는 스토리텔링을 낳고 말았다.

 

지금 되돌아보면 내가 옳았다고 확신할 수 없다. 나는 스토리텔링에 좀 더 전통적인 TV 접근방식을 적용하고 있었고, 데이비드는 시대를 앞서 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당시 데이비드가 시청자들을 좌절시키고 있다고 진심으로 느꼈지만, 로라 팔머 살인범에 대한 의문에 답을 내놓으라는 나의 요구가 어쩌면 극의 내러티브를 또 다른 혼란으로 몰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데이비드가 내내 옳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창작에 관한 프로세스 관리는, 먼저 그것이 과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모든 것이 주관적이고, 종종 옳고 그른 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데는 강력한 열정이 필요하다. 그런 열정을 가진 창작자들은 대부분 당연히 자신의 비전이나 실행에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면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나는 비즈니스에서 창작 부문에 속하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마다 이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인사이트를 달라거나 비평을 해달라고 요청받을 때면, 나는 창작자들이 해당 프로젝트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등에 대해 최대한 주의를 기울인다.

 

나는 무엇이든 부정적인 시각으로 시작하지 않고, 작품의 완성이 시급한 상황이 아닌 한 작게 시작하지도 않는다. 종종 사람들은 명확하고 일관된 큰 생각의 결핍을 숨기는 방편으로 소소한 세부사항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작게 시작하면 작은 것만 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다. 큰 그림이 엉망이라면, 작은 것들은 어차피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소소한 것들에 초점을 맞추느라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명백해 보이지만 종종 무시되는 무언가를 말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섬세한 균형 잡기가 필수다. 작품의 재정적 성과를 책임지는 경영과 그런 책무를 집행할 때 비생산적인 방식으로 창작 과정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처신 사이의 균형 말이다. 공감은 창의력의 건전한 관리를 위한 전제조건이며 존중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는 안전지대에 머물길 원치 않았다. 위대함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는 작업에 몰두하고 싶었다. 실패를 편안하게 받아들일 필요성, 그것이 황금시간대를 맡은 그 첫해에 내가 배운 모든 교훈 중에서 가장 심오한 것이었다. 이는 결실이 부족한 것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불가피한 진리에 대한 강조다. 혁신을 원한다면(반드시 언제나 혁신을 원해야만 한다), 실패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실수를 지우거나 자신의 잘못된 결정을 다른 사람 탓으로 전가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실패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또한 (비윤리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경우가 아니라면) 실패의 여파로 사람까지 내쳐서는 안 된다. 변함없는 신뢰와 지지를 보내면 그만큼의 존경과 선의가 되돌아온다.

 

ABC의 성공은 언제나 팀이 노력한 결과물이었지만, 그것은 내 경력에서 공개적으로 인정받은 나의 첫 번째 성공이기도 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들에 대해 내가 인정받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누구인가? 해당 직무에 대해 전혀 모른 채 엔터테인먼트 부문을 맡지 않았던가. 놀라운 재능을 가진 우리의 팀원들은 자신들이 아는 모든 것을 나에게 나누어주었다. 모두 그들 덕분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열심히 일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그들의 보스가 되었다는 사실에 전혀 위축되지도 않았다. 그들의 관대함과 배려 덕분에 우리는 함께 성공을 이루어냈다. 그럼에도 영예는 대부분 내게 주어졌다.

 

댄과 톰의 신뢰가 내게 큰 리스크를 감수할 용기를 주었고, 내게 강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창작자들에게 최선을 다해 기회를 잡으라고 독려하고 그들이 실패를 딛고 일어서도록 돕는 능력이었다. 투여되는 노력은 항상 집합적이었지만, 나는 엔터테인먼트 부문을 운영하며 일단의 능력자들로 하여금 최고 수준의 작품을 생산하도록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학습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대개 이상한 방식으로 나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 예를 들어 회사 외부의 인물이 우리를 찾아와 미팅을 가질 때면 테이블에 동료들 여럿과 함께 앉아 있을 때조차도 오직 나만 바라보며 나에게만 말을 거는 일이 빈번하다. 다른 CEO들도 나처럼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상황이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그래서 그런 상황이면 으레 동료들에게 칭찬과 관심을 돌리려 애쓰곤 한다. 또한 반대의 상황일 때, 즉 내가 디즈니 밖에서 일단의 사람들과 미팅할 때면 나는 테이블에 앉은 모두에게 일일이 말을 걸고 관계를 맺곤 한다. 비록 사소한 제스처일지 모르지만 조수로 취급되거나 무시당하는 느낌이 어떠한지를 잘 기억하는 나로서는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은 누구든, 무엇이든 유익하다.

 

1994년 9월, ABC 사장이 된 지 1년 9개월 만에 나는 캐피털시티즈/ABC의 사장 겸 최고운영책임자COO가 되었다. 현기증이 나고 때로는 불안한 느낌이 들 정도로 빠른 승진 궤도였다. 나는 통상 그들이 나를 승진시킨 것만큼 빠른 속도로 누군가를 승진시키는 방식을 권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 더 강조할 부분이 있다. 반복해서 강조할 가치가 있는 내용이다. “모든 단계에서 그들이 나를 믿어준 방식은 나의 성공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4. 디즈니에 들어가다

디즈니는 모든 것이 정반대였다. 마이클 아이즈너와 프랭크 웰스는 회사 경영을 맡은 초기부터 ‘전략기획실’이라는 중앙부서를 조직해 교육수준이 높고 적극적인 일단의 임원들을 그곳에 배치했다(그들 모두 MBA를 보유했고, 다수가 하버드나 스탠퍼드 출신이었다). 그들은 주로 분석작업을 수행했고, 마이클이 필요로 하는 데이터와 ‘통찰’을 제공했다. 마이클은 회사가 내리는 모든 사업적 결정의 안전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그런 통찰을 필요로 했으며, 창작과 관련된 결정은 모두 본인이 직접 내렸다. 전략기획실은 회사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 상당한 권한을 행사했으며, 다양한 사업부문을 운영하는 디즈니의 모든 고위임원들을 상대로 스스럼없이 권력을 휘둘렀다.

 

당시 내가 추진하려던 어떤 일에 대해 댄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는 메모지 한 장을 건넸다.

“트롬본 오일 제조 사업에는 뛰어들지 말라. 세계 최고의 트롬본 오일 제조업자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전 세계의 트롬본 오일 소비량은 연간 수십 리터에 불과하다.”

그는 많은 것을 돌려주지 않을 프로젝트에 회사와 나의 자원을 투자하지 말라고 말했던 것이다. 댄은 그런 식으로 지혜를 나눠주었다. 얼마나 긍정적인 방식인가.

 

오비츠는 매번 열정으로 충만한 채 새로운 아이디어를 들고 회의에 참석했지만, 테이블에 앉은 모든 임원은 현명한 마이클 아이즈너가 거기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마이클은 오비츠의 아이디어를 흘려들은 다음 업데이트된 사업 진행상황과 새로운 전략을 충실하게 점검하곤 했다. 그러면 오비츠는 기분이 상한 듯 회의 내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마이클의 관심 부족을 여기저기 소문내곤 했다.

 

그러한 불편은 고위경영진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조직의 최상위에 있는 두 사람이 역기능적 관계인데, 그 밑의 나머지 사람들이 무슨 수로 제대로 기능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항상 싸우는 부모를 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아이들은 늘 긴장감을 느끼고 부모에게 반감을 품거나 서로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리더는 그만큼 매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회의여도 리더는 종종 회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 리더는 늘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혀야 하며,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끝까지 듣고 해결책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훌륭한 경영자의 조건이다. 문제는 마이클 오비츠가 경영자의 자리에 올라서도 여전히 에이전트로 처신하는 데 있었다. 그는 그 사업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지만, 우리는 에이전시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합이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왜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각자가 자신의 필요에 다소 눈이 멀어 의도적으로 어려운 질문을 던지길 회피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당장의 기대에 초점이 맞춰진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무언가가 효과가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것이 어떤 식으로 작용해 성과를 낳을지에 대해 스스로 확실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바로 그 시점이 경보를 울려야 마땅한 때다. 상황을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한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며 차근차근 따져봐야 한다는 의미다.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이 해결책이 진정 합당한가? 의심이 든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타당한 이유로 이것을 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사적인 무언가에서 동기가 유발되었는가?

 

 

5. 2인자에 오르다

진정한 리더라면 주변 사람들이 더욱 높은 자리에 올라 더 큰 책임을 떠맡고자 하는 의욕을 불태우길 바라야 한다. 그들이 꿈꾸는 미래의 직무가 현재의 직무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말이다. 주어지는 기회보다 야망이 지나치게 앞서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은 희박한데 특정한 직무나 프로젝트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봐왔다. 아직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무언가에 초점을 맞추려 하면 그 자체로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현재의 직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인내심을 잃거나 조바심을 부리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야망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방법을 아는 것이 관건이다. 주어진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인내심을 유지하며 기여와 확장, 성장을 위한 기회를 찾아야 한다. 동시에 그런 기회가 찾아왔을 때 보스의 뇌리에 적임자로 떠오를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될 수 있도록 태도를 가다듬고 에너지와 집중력을 키워 나가야 한다.

 

CEO와 2인자 사이의 역학은 종종 긴장에 휩싸이는 게 사실이다. 누구나 자신이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길 원한다. 비결은 자신이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 수준의 자의식을 갖추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훌륭한 리더십은 대체 불가능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리더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준비를 갖추도록 아랫사람들을 지원하는 데 있다. 리더의 의사결정 과정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 자질을 파악해 그들이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이 아직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없는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알려주기도 해야 한다. 나 역시 지금까지 그런 일들을 해야만 했다.

 

다른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어 열정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그들이 품고 있는 의구심을 일일이 풀어주며,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의 염려에 대응해야 할 필요도 있다. 또 때로는 내가 보스이고 내 지시가 이행되길 원한다는 점을 간단명료하게 전달해야 할 필요도 있다. 전자는 ‘괜찮은’ 방법이고 후자는 그렇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협상의 여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일 뿐이다. 결국 그 순간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무엇이냐에 달린 문제다. 좀 더 민주적인 접근방식으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는 동시에 사기를 진작시킬 것인가, 아니면 반대의견과 정면충돌하더라도 (기꺼이 독재적인 보스가 되어도 괜찮을 정도로) 내 의견을 충분히 확신하느냐의 문제라는 얘기다.

 

 

6. 좋은 일은 일어날 수 있다

디즈니의 이매지니어링 부문은 많은 책과 기사의 주제가 되었다. 간단히 설명하면, 영화나 TV쇼 또는 소비자 제품을 제외하고 디즈니가 만드는 모든 창의적 아이디어와 기술 개발의 중심부다. 테마파크와 리조트, 관광명소, 유람선, 부동산 개발은 물론이고 라이브 공연과 라이트 쇼, 퍼레이드, 캐스트 멤버의 의상 디자인부터 성 건축에 관련된 모든 세부사항까지 이매지니어링 부문에서 나온다. 디즈니 이매지니어들의 놀라운 창의력과 탁월한 기술력은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다. 예술가, 엔지니어, 건축가, 기술자 등으로 구성된 그들은, 전 세계의 다른 어떤 조직도 필적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공원의 명소 중 하나에 대한 고객경험을 상술하는 스토리보드부터 곧 제작될 유람선의 개인 전용실 설계에 이르기까지, 마이클은 모든 것을 세세하게 검토했다. 또한 퍼레이드의 구체적인 내용과 새로 개장하는 호텔의 로비 디자인 등도 빠짐없이 체크했다. 나는 큰 그림과 세부사항을 동시에 보고, 여러 요소들이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까지 파악해내는 그의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2001년 초, 미디어 및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모든 기업들은 발밑에서 대대적인 지각 변동이 일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뛰어야 할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기술은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고 그로 인한 파괴적인 영향도 분명해지고 있었으며, 사람들의 불안도 커지고 있었다. 그해 3월, 애플은 “훔쳐라. 섞어라. 구워라Rip. Mix. Burn.” 캠페인을 개시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음악을 구매하면 원하는 대로 복제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전했다. 마이클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음악 산업 전반에 대한 치명적인 위협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TV와 영화 산업도 위협할 것으로 보였다.

 

실로 흥미로운 시기였다. 우리가 알고 있던 전통적인 미디어의 종말이 시작된 듯했다. 그와 관련해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거의 모든 전통적인 미디어 기업들이 급변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노력하면서도 용기를 내기보다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고, 이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기존 모델을 보호하는 데 고집스럽게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픽사와 공동 제작한 영화들이 예술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모두 크게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회사 사이(주로 마이클과 스티브 사이)에는 긴장이 팽팽했다. 최초의 거래가 이뤄질 때만 해도 픽사는 여전히 스타트업에 불과했던 까닭에 막강한 디즈니에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이 체결되었다. 픽사는 그 거래에서 자사 영화의 속편 일체에 대한 소유권을 포함해 많은 부분을 디즈니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더는 그런 비관주의를 주변 사람들에게 퍼뜨려서는 안 된다. 구성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에너지와 영감을 얼어붙게 만들며 방어적인 의사결정을 낳기 때문이다.

 

리더는 낙관주의를 잃어서는 안 된다. 특히 위기상황에서는 더더욱 필수적인 요소다. 비관론은 편집증을 낳고, 그것은 다시 방어적인 태도를 불러오며, 그것은 다시 리스크 기피 성향을 유도한다.

 

반면에 낙관주의는 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다른 역학을 발동시킨다. 특히 어려운 순간에, 당신이 이끄는 사람들은, 방어적인 태도를 일삼거나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게 아니라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리더의 능력에 대해 신뢰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상황이 좋지 않은데도 좋다고 말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상황이 호전될 것’이라는 신념을 전달하라는 의미도 아니다. 당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최상의 결과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끝장이라는 느낌 따위를 전달하지 말라는 의미다. 리더인 당신이 설정하는 분위기는 주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누구도 비관론자를 따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7. 문제는 미래다

과거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과거에 마이클이 내렸던 의사결정을 내가 옹호할 필요도 없고, 나의 이익을 위해 그를 비난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미래였다. 디즈니에서 지난 수년 동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마이클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그런 마이클과 나는 무엇이 다른지 등에 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나는 단순하고 정직하게 대답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시간을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고 그것을 앞으로 나아가는 데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같은 일을 반복하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사회는 제가 앞으로 이 회사를 어디로 이끌고 갈 것인가를 알고 싶은 것이지, 과거에 어디 있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회사를 이렇게 이끌어 나갈 계획입니다.”

 

스콧은 이렇게 조언했다. “반군의 수장처럼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고, 행동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단 하나의 명확한 생각에 근거해서 수립해야만 했다. “이것은 브랜드의 영혼을 위한 전투가 되어야 합니다. 브랜드에 대해 이야기하세요. 브랜드 가치를 어떻게 향상시키고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란 얘깁니다.”

 

“산만해 보일 뿐입니다.” 스콧이 말했다. “딱 3가지만 선택하세요. 그 3가지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는 내가 말해줄 수 없는 부분입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원치 않는다면 나에게 말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중요한 건 3가지만 정하는 겁니다.”

 

기업의 조직문화는 많은 요소들에 의해 그 형태를 갖춘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리더가 ‘우선사항’을 반복적으로 명확하게 전달하는 일이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위대한 경영자와 나머지를 가르는 요건이다. 리더가 우선사항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면 주변 사람들은 일할 때 무엇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시간과 에너지, 자본이 낭비되고 마는 것이다. 또한 구성원들은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불필요한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비효율이 만연하고 불만이 쌓이며 사기는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CEO는 회사와 고위간부들에게 로드맵을 제공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일은 복잡하고 집중력과 에너지를 상당히 많이 쏟아부어야 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지점은 이곳이다’,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은 이것이다’와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은 비교적 간단하다. 일단 그렇게 단순한 목표가 설정되고 나면 상당히 많은 의사결정을 수월하게 내릴 수 있다. 그러면 조직 전체를 감돌던 불안감도 잦아들게 된다.

 

  1. 고품질의 브랜드 콘텐츠를 창출하는 데 회사가 보유한 시간과 자본의 대부분을 쏟아부어야 한다. 점점 더 많은 ‘콘텐츠’가 생산되고 배포되는 시대에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품질이다. 품질의 중요성이야말로 갈수록 부각될 것이 확실하다. 많은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좋은’ 콘텐츠를 많이 생산하는 것도 충분치 않다. 선택의 폭이 폭발적으로 넓어진 시대의 소비자들은 자신의 돈과 시간을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에 대한 의사결정 능력을 필요로 한다. 위대한 브랜드는 그런 소비자 행동방식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더욱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2. 가능한 최대 범위까지 신기술을 수용해야 한다. 먼저 고품질 콘텐츠를 생산하는 데 기술을 활용해야 하고, 다음으로 더 많은 소비자들에게 더 현대적이고 더 적절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데 기술을 활용해야 한다. 월트 디즈니가 운영했던 초기 디즈니 시절부터 지금까지 기술은 언제나 강력한 스토리텔링의 도구였다. 이제 그 활용도를 더욱 늘릴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가 여전히 콘텐츠를 창조하는 역할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만 현대적 유통방식이 브랜드 연관성 유지에 필수적인 수단이 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소비자들이 우리가 창출한 콘텐츠를 더욱 디지털화된 방식으로, 모바일로 편리하게, 좀 더 사용자 친화적으로 소비할 수 없게 되면 우리의 타당성relevance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기술을 위협이 아닌 기회로 봐야 하며, 헌신과 열정, 긴박감을 갖고 기술 중심의 회사가 되어야 한다.

  3.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 변모해야 한다. 광범위한 사업부문을 보유하고 전 세계의 수많은 시장에서 비즈니스를 영위하고 있지만,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과 인도 시장에 대한 점유율 측면에서는 많은 개선이 필요하다. 탁월한 브랜드 콘텐츠의 창출이 첫 번째 목표라면 그다음 단계는 그런 콘텐츠를 전 세계 소비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글로벌 시장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굳건한 토대 위에서 의미 있는 규모의 성장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충성고객들을 위해 전과 다르지 않은 상품만 계속 생산한다면 결코 침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구든 그런 상황에서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말을 하는지, 또 어떤 기사가 나오는지 전전긍긍하며 소문에 휩쓸리기 십상이다. 자신도 모르게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옹졸해지며, 부당한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분을 참지 못한다. 나는 내가 디즈니의 CEO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확신하지도 않았고, 그 자리가 당연히 나의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다만 내가 그것을 추구할 자격이 있다고 믿었을 뿐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일에는 공개적으로 표현되는 무수한 의구심 앞에서 평정을 잃지 않는 것도 포함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은 나에게 끈기와 인내심의 중요성 그리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분노와 불안을 피해야 할 필요성을 동시에 일깨운, 실로 힘겹게 얻은 교훈이었다. 자존심을 지키되 거기에 과도하게 정신적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종종 그런 일이 벌어진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든 사람이 나를 훌륭하다고 평가할 때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이 침범당할 때, 그것도 그렇게 공개적인 방식으로 도전을 받을 때, 긍정적인 생각을 갖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하는가 하는 부분은 내가 통제할 수 있었다.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서 벗어난 것들이었다. 모든 순간 그런 시각을 견지할 수는 없었지만, 할 수 있는 최대한 그렇게 하고자 노력했고, 나는 지나친 불안감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었다.

 

 


Part 2. 이끌다 Leading

8. 존중의 힘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더욱 큰 심리적 갈등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사실 로이와 척지고 있던 사람이 비단 마이클만은 아니었다. 스탠리를 제외하면 디즈니 내에서 (그가 원하는 만큼) 그를 존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그의 삼촌 월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로이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은 적은 없었지만, 그날 로이의 모습에서 일종의 연약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모욕감을 안겨주어서 득이 될 일은 없었다. 그는 다만 존중받길 원하는 한 사람에 불과했고, 지금까지 그에게 타인의 존중은 쉽게 얻을 수 없었던 것일 뿐이었다.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 즉 자존심과 자존감에 관한 문제 같았다. 그의 전투는 수십 년째 이어져 오고 있었다.

 

나는 스탠리에게 다시 연락을 취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전달했다. ‘로이를 명예이사로 위촉하고, 영화 시사회와 놀이공원 개장식 그리고 회사의 특별행사 등에 초청한다(하지만 이사회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소정의 자문료를 지급하고 사무실도 마련해준다. 따라서 로이는 예전처럼 다시 디즈니에 오가며 자신의 집이라 부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대가로 소송을 취하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승리했노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일도 없어야 하며, 회사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도 중단해야 한다.’

 

이 일을 겪으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 사람들이 비즈니스 승계과정을 이야기할 때 흔히 간과하는 것이기도 한데, 바로 자존심에 관한 것이다. 최선의 의사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자존심이 장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 임무는 회사를 새로운 궤도에 올려놓는 일이었고, 그것을 위한 첫 번째 실무는 불필요한 분쟁의 뇌관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결국 가장 쉽고 가장 생산적인 방법은 로이가 필요로 하는 바를 인정하고 궁극적으로 그가 존중받는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로이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 소중했고, 나와 회사는 그것이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방법이었다.

 

약간의 배려와 존중은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그것의 결핍은 종종 엄청난 비용 부담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그로부터 수년간 굵직한 인수합병을 통해 회사를 재정립하고 소생시키는 과정에서 언뜻 진부해 보이는 이 단순한 원칙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정보분석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공감과 존중이라는 토대 위에서 접근하고 관계를 형성하고자 한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얼마든지 현실로 바꿀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새로 개발한 비디오 아이팟이에요.” 그가 말했다. 기기의 스크린은 겨우 우표 2장 크기였지만 그는 마치 아이맥스IMAX 상영관의 스크린이라도 되는 양 말하고 있었다. “아이팟으로 음악감상만 하는 게 아니라 동영상도 볼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만약 우리가 이 제품을 출시한다면 디즈니의 TV 프로그램을 콘텐츠로 제공해줄 수 있나요?”

 

스티브는 나의 대담성에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에게 디즈니와 사업적 협력관계를 진척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암시를 보내고 싶었다. 그가 가졌던 적지 않은 불만 중 하나는 디즈니와 함께 일을 진행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었다. 모든 합의사항은 늘 심사를 거쳐야 했으며 말라죽기 직전까지 분석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가 일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던 것이다. 나 또한 그런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 내가 이제 의사결정의 권한을 쥐었다는 것, 그리고 미래를 위해 두 회사가 힘을 모으길 내가 원하고, 그런 일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것을 그가 이해했으면 했다. 리스크를 기꺼이 감수하려는 내 의지와 사업적 직감을 그가 존중한다면, 그렇다면 어쩌면 픽사와 협력관계를 다시 맺을 수도 있는 일말의 여지가 생길 것 같았다.

 

같은 해 10월, 그러니까 내 사무실에서 첫 번째 대화를 나누고 5개월 후(그리고 내가 공식적으로 CEO 자리에 오른 지 2주 후) 스티브와 나는 애플의 신제품을 소개하는 무대 위에 나란히 섰다. 우리는 (당시 높은 시청률을 기록 중이던 ‘위기의 주부들’과 ‘로스트’, ‘그레이 아나토미’ 등 3개 시리즈를 포함해) 5편의 디즈니 프로그램을 아이튠즈를 통해 다운로드할 수 있으며, 동영상 재생 기능이 탑재된 새로운 아이팟으로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공식발표했다.

 

우리가 보여준 업무진행의 편의성과 속도는 애플과 애플의 제품에 대한 존중을 표현했다는 사실과 결합되어 스티브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나에게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자사의 비즈니스 모델을 파괴할 수도 있는 무언가를 그렇게 기꺼이 시도하고자 했던 사람은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타인에 대한 경멸적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두려움에 굴복하거나 아니면 좌절감에 무너져 현실에 안주해버리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직무에 대한 구성원들의 자부심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그들(전략기획실)은 지나치게 신중했다. 모든 의사결정에 그들만의 과도한 분석 기준을 들이대고 있었다. 이 유능한 인재 집단이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모든 사업 거래의 유불리를 걸러내는 동안 (결과적으로 무엇을 얻든) 행동을 취해야 할 적절한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철저한 조사와 신중한 접근방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숙제를 하고 준비를 갖추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올바른 결정인지 판단하는 데 필요한 모형을 만들어보지도 않고 중요한 인수합병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세상에 100% 확실한 것은 없다는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한다. 주어지는 데이터의 양과는 무관하게 여전히 그리고 궁극적으로 의사결정은 리스크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 리스크를 감수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는 결국 당사자의 직감에 의해 결정된다.

 

전략기획실의 재편은 정식취임을 앞둔 6개월 기간에 내가 한 일 중 가장 중요한 성과로 입증되었다.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는 기대 이상이었다. 전략기획실이 비즈니스의 모든 측면에서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는 일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공식발표가 나가자마자 조직 전체의 사기가 실로 놀라울 정도로 진작되었다.

 

 

9. 디즈니-픽사, 새로운 길을 열다

픽사 Pixar

무엇이 문제인지 찾아내기 위해 몇 달 동안 분석작업을 수행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 순간 바로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실상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좋은 영화를 만들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 요컨대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인기가 없었거나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이 되지 못했으며 디즈니의 비즈니스와 브랜드에 의미 있는 파급력을 실어주지 못한 것이었다. 디즈니는 창의성과 독창적인 스토리텔링, 훌륭한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설립된 회사가 아니던가. 그런데 근래에 제작된 영화 중 과거의 영광에 근접할 만한 작품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동안 픽사는 성공작에 성공작을 연달아 만들어내고 있었다. 창의적 측면에서도, 상업적 측면에서도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디즈니는 이제 겨우 손을 대보려고 하는 디지털 애니메이션 기술을 픽사는 이미 영화제작에 이용하고 있었으니 기술적으로도 훨씬 앞서가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픽사의 영화가 매우 강력한 방식으로 고객과 연결되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부모와 아이들 모두에게 말이다. 프레젠테이션을 돕던 톰은 재무적 측면의 정보를 담은 암울한 장표에 이어 디즈니 브랜드에 관한 조사결과를 화면에 띄웠다. 12세 이하의 자녀를 둔 여성들 사이에서 픽사는 “엄마들이 가족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브랜드에서 디즈니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일대일 비교에서도 픽사는 디즈니보다 훨씬 더 사랑받는 브랜드로 나타났다. 비교하는 게 창피할 정도로 큰 격차였다. 임원 중 몇몇이 서로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서 모종의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이어서 “애니메이션의 성패에 회사의 명운이 달렸다.”고 강조했다. 모든 면에서 그랬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그 자체로’ 브랜드였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은 소비자 제품과 TV, 놀이공원 등 다수의 다른 사업부문에 동력을 제공하는 연료와 같았다. 그런 브랜드가 지난 10여 년간 많은 고초를 겪은 셈이었다. 당시 회사는 픽사와 마블, 루카스필름을 인수하기 이전이었던 만큼 지금보다 규모가 훨씬 작았다. 따라서 회사의 대표 브랜드로서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업부문의 연료로서 애니메이션이 좋은 성과를 내야만 했다.

 

나는 3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현재의 경영진을 그대로 유지하며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이었다. 나는 이 안에 대해 재빨리 의구심을 표명했다. 지금까지 그들이 보여준 성과를 감안하건대 그런 기대를 갖기 어렵다는 의미였다. 애니메이션 부문을 이끌어갈 새로운 인재를 찾아내는 것이 두 번째 대안이었다. 그러나 지난 6개월간의 취임 대기기간 중 나는 애니메이션 업계와 영화 업계를 샅샅이 뒤지며 디즈니가 필요로 하는 수준의 능력을 갖춘 사람을 찾아보려고 애썼지만 결국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그게 아니면…,” 내가 말했다. “우리가 픽사를 인수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대대적인 변화를 기피하려 든다. 첫 발자국을 떼어놓기도 전에 무언가에 대한 시도가 승산이 있는지 판단하고 부정적 결과를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나 직감적으로 느끼는 무언가가 있다면(그리고 룬과 마이클 같은 상사들과 함께 일하는 동안 더욱 강화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승산이 없어 보여도 대개는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룬과 마이클은 둘 다 자신을 비롯한 조직의 역량으로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다. 충만한 에너지와 신중함 그리고 헌신적인 마음만 있다면 아무리 과감한 아이디어일지라도 반드시 실행에 옮길 수 있다고 믿었다.

 

존과 에드는 나를 따뜻하게 맞으며 이후 일정에 대해 설명했다. 오전 시간은 각 부서의 책임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일로 채워져 있었다. 그들이 각 부서에서 담당하고 있는 제작의 여러 부문들, 즉 영화의 1차 편집본, 스토리보드, 개념 미술(영화의 형식과 분위기를 설정하고 영감을 얻는 데 이용하는), 영화음악, 배역 리스트 등을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 그런 다음 그들의 새로운 ‘기술 파이프라인’을 직접 보고 기술적 측면이 창의적 측면과 어떻게 조화롭게 융합되는지 감을 잡게 되는 것이었다.

 

또한 에드와 그의 기술팀은 끊임없이 자신들만의 도구를 개발해 예술가들의 손에 쥐어주며 이전에는 미처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고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나 물, 안개를 표현하는 방식을 보세요!” 에드는 그때까지 개발된 가장 정교한 애니메이션 도구들과 더불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최상의 형태로 구현되도록 돕는 독창적인 기술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러한 음과 양의 조화가 바로 픽사의 본질이었다. 모든 것이 거기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톰에게 그들의 재능과 창의적 열정의 수준, 품질에 대한 헌신, 스토리텔링의 독창성, 기술적 진보, 리더십 구조, 열정적인 협업 분위기, 심지어 픽사 본사 건물의 건축양식 등에 대해 설명했다. 창의성이 필요한 비즈니스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비즈니스를 하든 누구나 열망할 만한 기업문화였다. 디즈니보다 훨씬 앞서나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디즈니가 독자적으로 성취할 수는 없을 것 같았기에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픽사 인수를 성사시켜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다른 모든 일도 마찬가지겠지만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지가 핵심이다. 주변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동기와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들의 조언, 면밀한 조사와 분석의 결과 그리고 분석을 통해 알 수 없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소를 따져봐야 한다. 어떤 상황도 서로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며 이 모든 요소를 신중하게 고려하고 나면 리더의 직감이 궁극적 잣대로 작용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것은 과연 올바른 결정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큰 리스크를 기꺼이 감수할 필요는 있다. 큰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면 그만큼 빛나는 성과도 없다.

인수작업을 진행하는 기업들은 정작 자신들이 무엇을 인수하는지와 관련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유형자산이나 제조자산 혹은 지적재산권을 획득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특정 업계에서는 비교적 그런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실제로 인수하는 것은 사람들이다. 창의성을 기반으로 하는 비즈니스에서는 바로 사람들에게 기업의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존에게 픽사가 구축한 독특한 문화를 보호할 수 있어야만 디즈니의 픽사 인수가 정당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해 애썼다. 픽사를 디즈니의 내부로 들여온다는 것은 리더십과 인적자원의 과감한 투입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제대로 이뤄지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도 했다. “픽사는 계속 픽사다워야 합니다.” 내가 말했다. “지금까지 구축해온 문화를 보호하지 못한다면 픽사의 진정한 가치를 훼손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우리는 이른바 ‘사회 계약’에 대해서도 협상을 진행했고 디즈니가 보존하기로 약속한 문화적으로 중요한 쟁점과 사안들에 대한 2페이지 분량의 합의안을 도출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픽사가 예전 그대로 유지되는 느낌이었고 따라서 그런 느낌을 보호하는 데 관련된 모든 것들이 중요한 문제였다. 예를 들어, 직원들의 이메일주소는 픽사의 주소를 그대로 사용한다, 사옥에는 여전히 픽사라는 간판을 남긴다, 신입직원을 위한 그들만의 환영식과 매달 열리는 맥주파티도 그대로 유지한다 등이 거기에 해당했다.

 

그보다 훨씬 민감한 협상은 영화와 상품, 테마파크 놀이기구 등에 적용하는 브랜드에 관한 사안이었다. 우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픽사의 브랜드는 이미 디즈니의 그것을 능가하고 있었다(물론 그들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특히 존과 에드가 디즈니애니메이션의 경영을 총괄하게 될 것이므로 나는 ‘디즈니-픽사’가 가장 강력할 것으로 느꼈고, 결국 그렇게 합의되었다. 픽사의 마스코트로 유명한 ‘룩소 주니어’는 계속해서 그들이 제작하는 모든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할 터였지만 순서는 ‘디즈니 성’ 그림 다음이 될 것이었다.

 

존은 디즈니에 대한 자신의 오랜 애정과 디즈니애니메이션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를 바라는 자신의 열망에 관해 이야기했다. 에드는 기술의 발전 방향과 디즈니-픽사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한 매우 지적이고 흥미로운 발표를 했다. 이 정도 규모의 거래에서 스티브보다 더 나은 판매자를 상상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대기업은 좀 더 큰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했고, 지금까지 디즈니가 걸어온 길과 그 경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나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았으며 (아이튠즈 콘텐츠 거래와 픽사의 문화를 보존하는 일에 관한 논의를 통해) 우리 사이에 형성된 유대관계도 강조했다. 그리고 이 황당한 아이디어를 성공작으로 만들기 위해 협력을 원하는 자신의 열망도 전달했다. 그의 발표를 지켜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긍정적인 성사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회의실로 들어가기 전 나는 심지어 잠시 시간을 내어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유명한 연설문인 ‘경기장 안에 있는 사람The Man in the Arena’을 다시 한번 훑어보기도 했다. 오랜 기간 나에게 영감을 준 연설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비평가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강자가 휘청거리는지,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었는지 지적하는 사람도 아니다. 영광은 먼지와 땀과 피로 범벅된 채 실제로 경기장 안에서 뛰고 있는 자의 몫이다.”

 

 

10. 마블, 과감한 리스크 감수와 경이로운 성과

All 22 Marvel posters in one frame (출처: Google)

픽사 인수는 디즈니애니메이션을 회생시켜야만 하는 시급한 요구 때문이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구상한 더 큰 성장 전략의 첫걸음이기도 했다. 그 전략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3가지였다. 첫째, 고품질 브랜드 콘텐츠의 양을 늘린다. 둘째, 기술적 진보를 통해 더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과 그것을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역량을 키운다. 셋째,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다.

 

아이크와 나는 기본적으로 성향이 매우 다르다. 디즈니가 마블을 인수한 이후 지금까지, 우리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의견 대립이 벌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가 살아오면서 스스로 성취한 모든 것을 진심으로 존중했다. 거의 무일푼으로 미국에 와서 오직 자신의 영민함과 강인함만으로 엄청난 성공을 일구어낸 인물이 아닌가. 나는 아이크가 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그때까지 이루어낸 성과를 내가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디즈니에게 자신과 회사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이크는 기업이라는 조직구조에 쉽게 적응하거나 그가 겉치레에 치중한 인간관계라고 인식하던 이른바 할리우드식 사교성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마블을 디즈니에 넘기는 데 거부감을 갖지 않게 할 방법은 그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진정성 있고 솔직한 사람, 그리고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과 거래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드는 것이었다.

 

디즈니가 마블을 인수한다면 그들이 가진 가치 중 일부가 훼손될 가능성이 있는가? 케빈 메이어와 팀원들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케빈과 나는 수개월에 걸친 논의 끝에 2개의 브랜드가 각각의 개성을 유지하도록 독립적으로 관리해 나갈 수 있다는 확신에 도달했다. 2개의 각기 다른 브랜드가 서로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공존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디즈니가 지금의 마블을 인수해서 마블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바꿔놓는다면, 이 세상에 그것만큼 어리석은 짓거리는 없을 겁니다.”

 

'아이언맨 2'가 개봉되었을 때 스티브는 아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한 후 다음 날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어제 저녁에 리드와 함께 영화를 보고 왔어요." 그가 말했다. "형편없더군요."

 

“그래요? 의견은 감사히 받을게요. 그런데 그 영화가 벌써 7,5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인 건 알고 있나요? 이번 주말에는 그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날 거예요. 스티브, 내가 당신의 비평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는 성공작이에요. 당신이 일반 관객에 속하지 않는 것뿐이지요.” 물론 나 역시 ‘아이언맨 2’로 오스카상 수상을 예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자신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훗날, 마블 인수가 완료된 이후 아이크는 당시에 여전히 의구심에 빠져 있었는데 스티브와의 전화통화로 큰 변화가 생겼다고 밝혔다. “그가 말하길 당신은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아이크가 했던 말이다. 나는 스티브가 가장 영향력 있는 이사회 임원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나를 위해 나서준 것에 깊이 감사했다. 이따금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당신이 최대주주이니 이런 부탁을 안 할 수가 없군요.” 그럴 때면 그는 항상 이렇게 대꾸했다.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건 모욕이거든요. 난 그저 좋은 친구일 뿐이에요.”

 

우리는 철저한 사전조사를 수행했고 시간이 지나면 2개의 브랜드가 어렵지 않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또한 마블의 세계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심오함이 담겨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조사과정에서 우리는 약 7,000개에 달하는 마블 캐릭터들의 자료 일체를 수집했다. 스파이더맨을 데려올 수 없고 여타 제작사들에 귀속된 권리를 포기해야 하더라도 우리가 캐어낼 수 있는 광맥은 여전히 깊고 풍부했다. 콘텐츠와 인재는 여전히 마블에 속해 있었다. 실제로, 케빈 파이기Kevin Feige가 이끄는 마블스튜디오의 제작진들은 자신들의 장기적 전망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즉 ‘MCU’라고 표현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고, 다수의 영화 속에서 여러 캐릭터들이 서로 연관되는 구상을 포함한 케빈의 전체 계획은 이후 10년 동안 사업을 이어가기에 충분했으며 내게는 매우 탁월한 비즈니스 기회로 보였다.

 

영화 사업은 흥미진진하면서도 동시에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여타의 전통적인 비즈니스와 그 운영방식이 다르다는 뜻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오직 직감에 따라 끊임없이 승부를 걸어야 하는, 모든 것에 리스크가 따르는 비즈니스다. 훌륭한 아이디어와 그것을 실현해줄 최고의 팀을 가지고 있더라도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이유로 추진 중이던 프로젝트가 궤도를 이탈한다. 대본이 제때 안 나올 수도 있고, 감독과 제작진 사이에 불화가 생길 수도 있다. 때로는 감독과 제작자의 견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며, 갑자기 경쟁작이 나와 예상을 뒤엎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할리우드의 화려함에 빠져들어 사업적 관점을 망각할 수도 있고, 또 그만큼 쉽사리 그에 대한 혐오감으로 사업적 관점을 망각할 수도 있다. 나는 지금까지 2가지 경우 모두를 수없이 목도했다.

 

2015년 5월, 나는 마블의 영화제작 사업부를 분리하여 월트디즈니스튜디오에 편입해 앨런 혼Alan Horn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이제 케빈은 앨런에게 직접 업무보고를 하게 되고, 앨런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있을 터였다. 그와 마블의 뉴욕 본사 간에 쌓여가던 긴장감 또한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었다. 전환 과정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지만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질 수도 있었던 긴장 상태는 궁극적으로 제거된 셈이었다.

 

누군가에게 해고를 알리는 훌륭한 각본이란 것은 있을 수 없겠지만 나에게는 내가 정한 나름의 원칙이 있다. 반드시 직접 대면해 전달한다는 것이다. 전화통화는 안 된다. 특히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로 해고를 통보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통보해야만 한다. 다른 누군가를 핑계 삼아서도 안 된다. 그러한 결정은 보스인 내가 내리는 것이며(그 사람에 대한 결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업무성과에 대한 결정을 의미한다) 그들 또한 그것이 보스의 결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고 알아야 마땅하다.

 

해고 통보를 하기 위한 자리에서 한담을 나누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나는 대개 이런 말로 대화를 시작한다. “지금 이 자리에 부른 것은 매우 어려운 말을 꺼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다음 가능한 한 단도직입적으로 내용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명확하고 간결하게 이유를 설명하고 내가 앞으로도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도 알려준다. 어려운 결정이었음을 강조하고, 당사자의 상황은 내가 겪은 어려움보다 더 힘겨우리라는 점을 충분히 이야기한다.

 

해고를 통보하는 대화는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솔직할 수는 있지 않은가. 솔직하게 의사를 전달하면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최소한 그런 결과에 이르게 된 이유를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다음 행보를 준비하는 데 참고할 수 있다. 불같이 화를 내며 그 방을 나선다 하더라도 말이다.

 

“예컨대 놀이공원과 리조트 사업부를 맡고 있는 책임자는 나의 승인 없이 2억 달러짜리 놀이기구를 설치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워너브라더스와의 관계가 그리 보기 좋게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앨런은 거의 완전한 재량권을 누린 바 있었다. CEO인 제프 뷰케스에게 영화 사업에 관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4,800km나 떨어진 뉴욕에 있었다. “저는 고작 10m 거리에 있습니다.” 내가 앨런에게 했던 말이다. “그리고 저는 영화 사업부에 매우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마음을 정하기에 앞서 당신이 맡을 사업부의 일에 분명히 내가 관여하게 될 것이란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99%는 원하는 대로 사업을 이끌고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자율권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흑인이 주인공인 슈퍼히어로 영화는 흥행에 성공할 수 없다는 회의적 견해는 단지 뉴욕의 마블 팀만의 것이 아니었다. 흑인 위주의 등장인물로 구성된 영화나 흑인이 주인공인 영화는 대부분의 글로벌 시장에서 역시 성공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할리우드의 지배적 견해이기도 했다. 때문에 흑인이 주도하는 영화의 제작이나 흑인 배우에 대한 캐스팅은 매번 제한적으로 이뤄졌고, 제작이 결정된 이후에도 흥행수익 측면에서 리스크를 낮추기 위해 예산이 삭감되기 일쑤였다.

 

나 역시 영화 업계에서 오래 전부터 내려온 그런 주장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변화한 세상과는 맞지 않는 낡은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은 지 오래였다. 그런 편견에 연연해서는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뒤집어보면 우리에게는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 대표자가 불충분한 소수집단에 자긍심을 심어줄 기회가 있는 셈이었다.

 

 

11. 스타워즈

Rise of Skywalker (출처: Google)

“저는 운명론자는 아닙니다만, 조지, 만약 이런 대화를 원치 않으신다면 그만하라고 제지하셔도 됩니다. 그대로 받아들이고 단념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테이블에 올려놓고 고려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같이 한번 판단해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뒤를 이어 회사를 이끌어갈 후계자가 아직 없는 상황으로 알고 있습니다.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회사를 장악하려 할 뿐 이끌어나가려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제 누가 당신의 유산을 보호하고 또 존속시켜 나갈 것인지 결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말을 하는 동안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매각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그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에요. 만약 내가 회사를 매각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구매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디즈니가 될 겁니다.” 그는 ‘젊은 인디애나 존스 연대기’ 시절을 회상하며 시청률이 저조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시즌 2 제작을 승인했던 것을 매우 고맙게 여겼다고 말했다. 그리고 픽사 인수 이후 디즈니가 픽사를 어떻게 이끌어왔는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분명 스티브와 조지는 그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을 터였다. “참 잘했더군요.” 그가 말했다. “배려든, 관리든, 운영이든, 모자람이 없어요. 혹시라도 마음을 먹는다면 내가 전화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겁니다.”

 

플로리다에서 조지와 대화를 나눈 후에, 나는 내가 먼저 다시 그에게 연락을 하지는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앞서 마블과 픽사를 인수한 이유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미래전략에 완벽히 부합하는 루카스필름의 인수에 열의를 불태웠던 케빈 메이어를 비롯한 디즈니의 몇몇 중역들은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협상을 진전시킨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가 원하기 때문이어야 했다. 나는 그렇게 조지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존중과 애정을 표했고, 오직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 좌우될 문제라는 점을 그가 알아주길 바랐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리기로 했다.

 

협상에 들어갈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그저 분위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무언가를 제안하거나 약속하는 일이다. 결국엔 역효과를 유발할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처음부터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상책이다. 단지 협상 과정을 출발시키기 위해 혹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상황을 오도한다면 궁극적으로는 불리한 결과만 초래된다.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픽사와 같은 조건의 거래는 불가능해요, 조지.” 인수를 위한 협상에 앞서 픽사를 직접 방문했던 일과 그곳에서 내가 발견했던 풍부한 창의적 역량을 떠올리며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나는 루카스필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 그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선 기밀보장 계약부터 체결한 다음 내부적으로 과도한 의구심을 유발하지 않는 수준에서 평가 작업을 진행할 것을 약속했다.

 

일반적으로 자산을 취득할 때 우리가 지불하는 금액이 애초에 판단한 가치에서 심하게 벗어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일반적인 관행은 낮은 금액에서 출발해 평가한 자산의 가치보다 훨씬 낮은 금액을 지불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밟으면 협상의 상대방을 소외시키는 위험을 자초하게 된다.

 

조지가 영화제작에 얼마나 관여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보다 힘겨운 협상을 시작했다. 픽사의 경우, 존과 에드가 픽사의 운영에 계속해서 관여할 뿐 아니라 디즈니애니메이션의 운영까지 책임진다는 조건이 전제되었다. 존은 최고크리에이티브책임자CCO의 직함을 달았지만 여전히 나에게 업무보고를 했다. 또한 마블 역시 인수 이후 케빈 파이기와 팀원 전체가 나에게 작업 진행상황에 대해 직접 대면 보고를 했고, 마블 영화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 나와 긴밀히 협력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회사의 명운이 걸린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현장에서 그것을 진행하는 사람에게 불필요한 압박을 가해 득이 되는 경우는 없다. 팀원들에게 내가 느끼는 불안과 초조를 표출하는 것은 역효과를 초래할 뿐이다. 미묘하기는 하지만 (그들과 함께 참여하며) 그들이 느끼는 긴장감을 공유하고 있음을 전달하는 것과 내가 느끼는 긴장감을 완화하기 위해 그들에게 성과를 요구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던 어느 누구에게도 거기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를 상기시켜줄 필요는 없었다. 내가 할 일은 창의적 측면과 현실적 측면의 걸림돌에 직면했을 때 누구도 우리의 원대한 목표를 망각하지 않도록 독려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도출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때로는 그것이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는 일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대본의 수정안을 함께 검토하거나 무수히 많은 촬영 컷을 지켜보는 일이 되기도 했다. 또한 종종 제이 제이와 캐시 케네디, 앨런 혼에게 내가 그들 모두를 신뢰하고 있으며 이 영화를 제작하는 데 그들 이상의 적임자는 없다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일도 포함되었다.

 

영화제작사가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개봉일정에 집착한 나머지 완벽한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제작을 강행하는 것이다. 때로는 일정 때문에 잘못된 의사결정을 하기도 한다. 나는 정해진 일정을 준수해야 하는 압박감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더 나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개봉일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언제나 다른 어떤 것보다도 품질을 최우선으로 삼기 위해 노력했다. 그로 인해 손익계산의 측면에서 단기적 충격을 감수해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스타워즈’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영화를 내놓는 일이었다. ‘스타워즈’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사랑과 헌신을 바칠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는 무언가를 제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디즈니의 첫 번째 ‘스타워즈’ 영화가 그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다면 신뢰를 파괴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고, 그것을 다시 회복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터였다.

 

4년 반 전, 조지와 아침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나는 그것이 그에게 매우 힘겨운 결정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 역시 그가 준비가 되면 나를 믿어도 된다는 점을 전달하고자 노력했었다. 인수금액과 그가 제작에 계속 관여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이어진 그 모든 협상은 조지가 이루어 놓은 업적에 대한 나의 존경심과 회사의 매각이 그에게 힘겨운 결정이라는 점에 대한 나의 이해, 그리고 회사에 대한 나의 책임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조지의 입장에 공감할 수는 있었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는 없었다. 매번 내 입장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었고, 동시에 협상 과정 자체가 그에게는 매우 감정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도 주의 깊게 대처해야 했다.

 

픽사와 마블, 루카스필름의 인수를 돌이켜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 회사들 덕분에 디즈니의 혁신이 가능했다는 점 외에도 각각의 협상이 단 한 명의 지배적 존재와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이다. 매번 협상이 필요한 복잡한 쟁점들이 있었고 길고 긴 시간 동안 밀고 당기는 과정을 거쳐 최종합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결국 최종적인 계약의 성사 여부는 매번 인간적인 요소에 좌우되었다. 인간적인 진실성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얘기다. 스티브는 픽사의 본질을 존중하겠다는 나의 약속을 신뢰해야 했다. 아이크는 마블 팀이 가치를 인정받고 새로운 조직 안에서 발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확신하고자 했다. 그리고 조지에게는 자신의 유산이, 자신의 ‘어린 자식’이 디즈니에서 제대로 보살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12. 혁신 아니면 죽음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는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찾아 변화의 선두에 설 수 있는가? 새로운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 여전히 수익성이 있는 기존 사업을 축소시킬 배짱이 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가? 우리가 회사를 진정으로 현대화하고 변혁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손실을 과연 월스트리트는 용인할 것인가?

 

기술 플랫폼을 자체적으로 구축할 것인가, 아니면 구매할 것인가? 케빈 메이어는 나에게 기술 플랫폼 구축에 5년은 걸릴 것이고 막대한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매입하면 즉시 전환에 들어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모든 것의 변화속도를 보건대 5년이나 인내심을 발휘하며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 거래에서 발을 빼기로 결정했다. 이전의 인수에서, 특히 픽사를 인수할 때 그것이 회사를 위한 올바른 결정이라는 나의 직감을 믿는 것이 핵심이었다면, 트위터의 인수에 대해서는 나의 직감이 정반대로 흘렀다. 내 안의 무언가가 그것은 옳은 결정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트위터가 디즈니의 새로운 목적에 충분히 부합할 것이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하지만 브랜드와 관련된 문제가 계속 내 마음을 괴롭혔다. 트위터는 강력한 잠재력을 지닌 플랫폼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너무나 많은 난제가 따라붙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한 난제와 논란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였는데,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만 꼽자면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인종, 종교, 성별 등과 관련해 타인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는 발언-옮긴이)를 관리해야 하는 문제, 언론의 자유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큰 결정을 내려야 하는 문제, 알고리즘을 이용해 정치적 메시지를 쏟아내는 허위계정을 추적하고 처리해야 하는 문제, 소셜미디어 플랫폼에서 때때로 분출되는 일반적인 분노와 무례를 감당해야 하는 문제 등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디즈니의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그때까지 직면했던 문제들과는 사뭇 다른 것들이었다. 나는 그로 인해 디즈니 브랜드가 손상되고 가치가 떨어질까 봐 걱정스러웠다.

 

나는 평소에 ‘해결책도 없이 문제를 늘어놓는 짓은 피하라’ 하는 점을 늘 강조해왔다(이것은 우리 팀에도 누누이 이야기하는 사항이다. 문제를 들고 나를 찾아오는 것은 얼마든지 괜찮다. 다만 가능한 해결책도 같이 가져오라는 뜻이다). 나는 디즈니가 경험하고 있던 변화와 전망을 자세히 설명한 후, 다음과 같은 과감하고 공격적이며 포괄적인 해결책을 이사회에 제시했다.

 

“뱀테크의 지배 지분을 구매할 수 있는 옵션의 행사를 앞당겨 그 플랫폼을 활용해 디즈니와 ESPN의 콘텐츠를 소비자에게 직접 제공하는 ‘OTT(over the top, 인터넷을 통해 미디어 콘텐츠를 제공하는 방식-옮긴이)’ 비디오 스트리밍 서비스를 구현한다.”

 

디즈니는 TV 채널이 지속적으로 적절한 수익을 창출하는 한 전통적인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TV 사업을 해나갈 것이고, 마찬가지로 전 세계 영화관의 대형화면에서 계속 우리의 영화를 선보일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중개자를 거치지 않고 소비자에게 직접 우리의 콘텐츠를 배포하는 주체가 되는 일에 완전히 몰두할 작정이었다. 그것은 사실상 자체 사업부문의 파괴를 서두르며 상당한 수준의 단기적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한 가지만 예를 들면, 넷플릭스에서 픽사와 마블, 스타워즈를 위시한 디즈니의 모든 TV 프로그램과 영화를 내리고 자체 구독 서비스에 통합하는 경우 라이선스 수익의 손실이 수억 달러에 달할 수 있었다.

 

과거 어느 시점부턴가 나는 ‘보도자료를 통한 경영’이라는 개념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이 개념은 내가 만약 큰 확신을 갖고 무언가를 외부 세계에 밝히면 그것이 우리 회사 내부에서도 강력하게 공명한다는 의미다. 2015년 투자업계의 반응은 압도적으로 부정적이었지만, 현실에 대한 나의 솔직한 토로는 그에 대한 거부를 강조하는 것이었고 디즈니 내부 사람들로 하여금 ‘보스가 상황을 진짜 심각하게 보고 있으니 우리도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2017년의 실적보고 화상회의도 비슷한 보강 효과를 유발했다. 우리 팀은 내가 그 일에 얼마나 진지하게 매달리고 있는지 알았지만, 대외적으로 공표된 그 내용을 듣는 것은 격이 다른 경험이었다. 특히 투자자들의 반응을 목도한 내부의 모든 임직원들은 그 일에 매진하려는 열정과 의욕이 충만해졌다.

 

지금은 잘 돌아가고 있지만 미래가 의심스러운 사업부문을 파괴한다는 결정은, 다시 말해서 장기적 성장을 기대하면서 의도적으로 단기적 손실을 감수한다는 뜻이다. 그러한 결정은 실로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기존의 일상 업무와 우선순위를 깨뜨리고 직무를 바꾸고 책임을 재할당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 전통적인 비즈니스 방식이 무너지고 새로운 모델이 부상하면 사람들은 불안해하기 십상이다. 인적자원 측면에서 관리할 게 많아진다는 뜻이다. 또한 직원들과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신경을 써줘야 할 필요성(물론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리더의 중요한 자질이지만)이 더욱 높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큰 조직의 리더일수록 자신의 일정이 너무 빡빡하고 시간이 너무 귀중해서 개별 직원들의 문제나 우려에는 신경 쓸 수 없다는 신호를 보내기가 쉽다. 그러나 리더가 직원들과 함께하며 언제든 시간을 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은, 조직의 사기와 효율성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디즈니 같은 규모의 회사에서 이는 전 세계를 돌며 다양한 사업 단위와 정례적으로 타운홀 미팅 방식의 회합을 갖고 내 생각을 알리면서 우려사항에 답변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한 시의적절한 방식으로 응답하고 보고라인을 통해 직접 내게 전해지는 어떤 사안이든 사려 깊게 고려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부재중 전화에 회신하고, 이메일에 답장을 보내고, 구체적인 문제와 관련해 대화를 나눌 시간을 내고, 임직원들이 느끼는 압박을 세심히 배려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우리가 그 새롭고 불확실한 행보를 개시하면서 나의 직무에서 이 모든 일이 훨씬 더 중요해졌다.

 

혁신을 꾀할 때는 제품을 생산하거나 제공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 사내의 많은 관행과 구조도 조정해야 한다. 이번 경우에는 이사회가 경영진에게 보상하는 방식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나는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하나 제안했다. 사실상 디즈니의 새로운 전략에 임원들이 얼마나 기여했는지에 따라 내가 보상수준을 결정하게 해달라는 아이디어였다. 쉽게 측정할 수 있는 재무성과가 나올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것은 곧 기존의 전형적인 보상구조에 비해 훨씬 더 주관적인 잣대가 적용된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그렇게 21세기폭스의 현재와 미래 가치에 대해 파악했다. 그다음으로 던진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두 회사가 합치면 가치가 얼마나 되는가? 합병을 통해 가치를 높일 방도는 무엇인가? 두 회사를 합쳐서 운영하면 효율성이 높아질 것은 분명했다. 예를 들어, 양쪽의 영화제작사들을 모두 하나의 우산 아래에 두면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다. 시장에서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도 중요했다. 갑자기 지역 자산을 더욱 많이 소유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인한 우리의 시장 접근성이 얼마나 향상될 것인가? 예를 들면, 우리가 진출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던 인도 시장에서 그들은 이미 D2C(Direct–to–Consumer, 소비자 직거래-옮긴이)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올라 있었다. 그들은 또한 탁월한 TV 스튜디오를 보유했고, 창작 부문 인재들에게 많은 투자를 한 상태였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한참 뒤처진 편이었다. 여타의 인수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21세기폭스 사람들에 대해서도 평가했다. 그들을 데려오면 우리의 사업에서 보다 많은 성공을 일궈낼 수 있는가? 대답은 ‘완전히 그렇다’로 나왔다.

 

“밥, 당신이 주창해온 내러티브가 이미 있지 않습니까.” 케빈이 말했다. 협상은 아직 시작도 안 됐는데 케빈의 머릿속 기어는 벌써 돌아가고 있었다. “그 내러티브로 밀고 나가면 됩니다. 고품질의 콘텐츠, 기술, 글로벌 사업, 그 3가지면 충분합니다.”

 

 

13. 돈으로 살 수 없는 고결함

루퍼트와 합의가 이루어진 직후부터 나는 ‘이 거대한 두 기업을 과연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라는 구체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디즈니가 이미 가지고 있던 것에 폭스를 추가하는 것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기존의 가치를 보존하는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면 신중한 통합 작업이 필요했다. 나는 새로운 회사는 어떤 모양을 갖추게 될지, 어떤 모양을 갖출 수 있을지, 어떤 모양을 갖추어야 할지를 하나하나 자문해보았다. 만약 과거의 발자취를 모두 없애고 현재의 모든 자산으로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면 어떻게 구조를 짜야 마땅할까?

나는 우선 ‘콘텐츠’와 ‘기술’을 구분했다. 우리는 이제 영화(월트디즈니애니메이션, 디즈니스튜디오, 픽사, 마블, 루카스필름, 21세기폭스, 폭스2000, 폭스 서치라이트), 텔레비전(ABC, ABC뉴스, 기존의 TV 방송국, 디즈니채널, 프리폼Freeform, FX, 내셔널지오그래픽), 스포츠(ESPN), 이렇게 3가지 콘텐츠 그룹을 갖게 된다. 그 세 그룹을 모두 화이트보드 왼쪽에 적었고, 애플리케이션, 사용자 인터페이스, 고객 확보 및 유지, 데이터 관리, 판매, 배포 등의 기술 관련 키워드를 오른쪽에 적었다. 콘텐츠 부문의 인재들은 창의성에 집중하고, 기술 부문의 인재들은 콘텐츠 배포 방법, 그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방법에 집중하게 해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다음 화이트보드 중간에 ‘물리적 엔터테인먼트와 상품’이라고 적었다. 소비자 상품, 디즈니 스토어, 전 세계의 상품 및 라이선스 계약 일체, 크루즈, 리조트, 6개의 놀이공원 등 세계 곳곳에서 확장되고 있던 다양한 사업을 포괄하는 범주였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화이트보드를 쳐다보며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현대 미디어 기업은 바로 이런 모양새를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 에너지가 충만해짐을 느낄 수 있었고, 그 구상을 정교하게 다듬는 일로 이후 며칠을 보냈다.

 

나는 로잔느가 과거에 올린 트윗이 종종 논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방송이 시작된 이후 그녀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경솔하고 때로는 공격적인 트윗을 다시 올리기 시작했다. 그대로 두었다간 골칫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마침내 내가 말했다. “올바른 결정을 할 수밖에 없군요. 정치적으로 바람직하거나 상업적으로 바람직한 결정이 아닌, 그냥 올바른 결정 말입니다. 우리 직원 중 누구라도 로잔느의 트윗과 같은 내용의 글을 공개적으로 게재했다면 즉시 해고되었을 겁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발레리 자렛을 무슬림 동포애와 원숭이 혹성의 산물이라고 표현한 로잔느 바의 트윗 소식으로 잠을 깨야 했습니다. 전후 상황이 어찌 되었든 그 표현은 용인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개탄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으며 이에 우리는 로잔느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폐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지금까지 정치적 혹은 상업적 측면보다는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요컨대, 회사를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제품의 높은 품질과 진실성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회사에 불명예를 초래하는 명시적 위반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으며 2번의 기회가 주어질 수 없습니다. 로잔느의 트윗은 회사의 기본적인 가치를 침해했고, 우리는 도덕적 기준의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대한 회사의 공식입장이 즉각적으로 발표될 예정입니다.”

 

프로그램을 폐지함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재무적 여파가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는 사람과 제품의 품질, 진실성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원칙이 최우선이었고 모든 것은 그 원칙을 얼마나 철저하게 고수하느냐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14. 핵심가치

Disney Plus at D23 2019 (출처: Polygon)

스마트 TV와 태블릿, 휴대전화기 등의 단말기에서 애플리케이션이 작동하는 방식을 시연하기 위해 케빈 메이어가 무대에 올랐을 때 나는 2005년 아이팟의 시제품을 손에 든 채 내 사무실에 서 있던 스티브 잡스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업계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당시 우리는 변화를 기꺼이 수용했고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15년 전 우리가 스스로 던졌던 것과 유사한 질문을 짚어 나가고 있지 않은가. 고품질 브랜드 제품이 변화된 시장상황에서 더욱 큰 가치를 보유할 가능성은 있는가? 어떻게 하면 고객들에게 우리의 제품을 더욱 적절하게, 더욱 창의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가? 새로 형성되고 있는 소비 습관은 어떤 것이며 우리는 어떻게 거기에 적응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기술로 인한 붕괴 혹은 파괴의 희생자가 되지 않고, 성장을 위한 새롭고 강력한 도구로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가?

 

최근 들어 더욱 확신을 갖게 된 무언가로부터 나는 위안을 얻었다. 한 사람이 과도한 권력을 지나치게 오랫동안 가지면 결코 좋지 않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생산성과 효율성이 아무리 탁월하다 할지라도 기업은 일정 시점 이후로는 CEO를 교체할 필요가 있다. 다른 CEO들이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직위는 막강한 권력을 축적할 수 있고, 그럴수록 그것을 행사하는 데 절제력을 유지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사소한 것들부터 바뀌기 시작한다. 자신감이 자신에 대한 과도한 신뢰로 바뀌고 결국 장애가 되기도 한다. 이미 모든 것을 안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인내심이 사라지고 타인의 의견을 묵살할 수도 있다. 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대개는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다양한 의견에 관심을 보이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나는 지근거리에서 함께 일하는 임원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일종의 안전장치인 셈이다. “만약 내가 지나치게 오만하거나 인내심을 잃은 모습을 보이면 나에게 꼭 알려주어야 합니다.”

 

진실은 이렇다. 나는 CEO로서 회사를 이끌기 위해 미래 계획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뿐이다. 나는 다만 다른 무엇보다 ‘품질’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을 뿐이고, 새로운 기술과 파괴를 두려워하는 대신 수용할 필요가 있으며, 새로운 시장을 확장해 나가는 일이 관건이라는 데 확신을 가졌을 뿐이다. 이 여정이 어디서 어떤 식으로 끝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는 전혀 없었다.

 

누적된 경험도 없이 리더십의 원칙을 결정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훌륭한 멘토들이 있었다. 마이클 아이즈너가 그중 한 명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전에는 톰과 댄이 있었고 그 이전에는 룬이 있었다. 그들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대가의 경지에 오른 인물들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다음은 나의 직관을 믿었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권유했다. 나의 ‘직관’이 특정한 리더십의 자질(분명히 설명할 수 있는)로 형성된 것은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다.

 

사실 내 인생에는 아직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지나온 삶의 궤적들이 완벽하게 앞뒤가 맞아떨어진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의미다. 오늘이 내일로 이어졌고, 이 직무가 저 직무로 연결되었으며, 하나의 선택이 다음의 선택을 잉태했다. 이렇게 삶의 스토리라인에 일관성과 연속성이 주어질 수도 있는 것인가. 개중에는 지금과 다른 결과로 이어졌을 뻔했던 순간들도 무수히 많았다. 나에게 주어진 행운이나 내가 만난 훌륭한 멘토들 혹은 저것이 아닌 이것을 선택하도록 만든 나의 직관이 없었다면 과연 지금의 내가 이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겠는가. 행운이 성공의 많은 부분을 좌우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지금까지 놀랍도록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돌이켜보면 실로 꿈만 같았던 일들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우리 대다수가 이와 유사한 삶의 여정을 밟았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내가 누구이고 어떤 상태에 이르렀든, 본질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오래전 지금보다 단순했던 어느 시기의 꼬마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리더십의 비결 또한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에게 막강한 힘이 있고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온 세상이 부추기더라도 본질적 자아에 대한 인식을 놓치지 않는 것이 바로 리더십의 비결이라는 얘기다. 세상이 하는 말을 지나치게 믿기 시작하는 순간, 어느 날 거울을 보며 이마에 자신의 직함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이미 삶의 방향은 사라진 것이다. 삶의 여정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든 나는 언제나 지금까지의 나와 같은 사람이다. 이 사실은 아주 어렵지만 가장 필수적인 교훈으로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한다.

 

 


서평

조금씩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게 아닌가 싶었던 월트 디즈니의 유산이 어느새 콘텐츠 산업의 중심에 서있습니다.

픽사와 마블, 스타워즈 등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친숙한 콘텐츠 중 하나는 디즈니 것이라 해도 될 정도입니다.

 

그리고 현재 디즈니+를 통해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자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디즈니+는 한국에 이르면 2021년 6월부터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엄청난 변화의 과정을 이끌어 온 리더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통해 2020년까지 거대 기업 디즈니의 리더를 맡아온 밥 아이거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