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모름지기 작가 지망생이라면 《문체 요강》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 윌리엄 스트렁크 2세, 관련 정보는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력서
작가의 자질은 타고나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자질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조금씩은 문필가나 소설가의 재능을 갖고 있으며, 그 재능은 더욱 갈고 닦아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언제부턴가는 나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창조에 앞서 모방부터 했다. 《컴뱃 케이시》 만화책을 공책에 한마디 한마디 베꼈는데, 이따금씩 적당한 곳에는 내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들은 넓고 왜풍이 센 농가에서 밤을 지샜다'고 쓰는 식이었다. 그로부터 한두 해가 더 지나서야 나는 '왜풍'과 '외풍'이 전혀 다른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여섯 살 나이에는 알쏭달쏭한 것들이 많은 법이다.
이 자리에서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이 세상에 ‘아이디어 창고’나 ‘소설의 보고’나 ‘베스트셀러가 묻힌 보물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의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허공에서 느닷없이 나타나 소설가를 찾아오는 듯하다. 전에는 아무 상관도 없던 두 가지 일이 합쳐지면서 전혀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가가 해야 할 일은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막상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혀가 상품 교환권처럼 녹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저 빌어먹을 상품 교환권을 지하실에서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바로 그 순간 <행복 교환권>이라는 단편 소설이 탄생했다. 상품 교환권을 위조한다는 생각과 어머니의 녹색 혓바닥이 순식간에 소설 한 편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쓸 때는 자신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해라. 그리고 원고를 고칠 때는 그 이야기와 무관한 것들을 찾아 없애는 것이 제일 중요해.”
내가 처음으로 두 건의 기사를 제출하던 그날, 굴드는 그 밖에도 흥미로운 조언을 해주었다. 글을 쓸 때는 문을 닫을 것, 글을 고칠 때는 문을 열어둘 것. 다시 말해서 처음에는 나 자신만을 위한 글이지만 곧 바깥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는 뜻이었다. 일단 자기가 할 이야기의 내용을 알고 그것을 올바르게 ─ 어쨌든 자기 능력껏 올바르게 ─ 써놓으면 그때부터는 읽는 사람들의 몫이다. 비판도 그들의 몫이다.
역시 좋은 글이란 사람을 취하게 하는 동시에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바위처럼 침착한 사람들도 미친 듯이 성교에 몰두할 수 있다면 ─ 적어도 성교 중에는 정말 얼이 빠져버린다면 ─ 글쟁이들이 제정신을 유지하면서 살짝 돌아버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가 그렇듯이 작가도 처음에는 등장 인물에 대하여 그릇된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이에 버금가는 깨달음은, 정서적으로 또는 상상력의 측면에서 까다롭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작품을 중단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이다. 때로는 쓰기 싫어도 계속 써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형편없는 작품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좋은 작품이 되기도 한다.
지금 여러분의 책상을 한구석에 붙여놓고, 글을 쓰려고 그 자리에 앉을 때마다 책상을 방 한복판에 놓지 않은 이유를 상기하도록 하자. 인생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글쓰기란 무엇인가
여러분은 아마 저마다 멀리 볼 수 있는 곳, 즉 정신 감응으로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장소에 있을 것이다. 물론 '몸소' 그런 곳에 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책이란 어디든지 갖고 다닐 수 있는 마술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비유를 사용할 때는 세부적인 내용을 소홀히 하기 쉽다. 그렇다고 사소한 특징들을 일일이 나열해야 한다면 글쓰기의 재미가 몽땅 사라지고 만다. 과연 이런 설명이 필요할까? '테이블 위에는 가로 106cm, 세로 61cm, 높이 35cm인 토끼장 하나가 있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토끼장도 아니고, 그 속에서 당근을 먹고 있는 토끼도 아니고, 다만 그 토끼의 등에 찍힌 숫자이다. 6도 아니고, 4도 아니고, 19.5도 아니다. 숫자는 8이다. 우리는 모두 그 숫자를 보고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것을 보라고 말하지 않았다. 여러분도 나에게 묻지 않았다. 나도 입을 연 적이 없고 여러분도 입을 연 적이 없다. 더욱이 우리는 같은 방안에 있기는커녕, 같은 연도에 있는 것조차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함께 있다.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어서 글쓰기를 시작할 수도 있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서 시작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러나 경박한 자세는 곤란하다. 다시 말하겠다. ‘경박한 마음으로 백지를 대해서는 안 된다.’
연장통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글쓰기에서도 자기가 가진 최선의 능력을 발휘하려면 연장들을 골고루 갖춰놓고 그 연장통을 들고 다닐 수 있도록 팔심을 기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으면 설령 힘겨운 일이 생기더라도 김이 빠지지 않고, 냉큼 필요한 연장을 집어들고 곧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다.
가장 많이 쓰는 연장은 글쓰기의 원료라고 할 수 있는 낱말들이다. 이 경우에는 여러분이 이미 갖고 있는 것들만 잘 챙겨도 충분하다.
글쓰기에서 정말 심각한 잘못은 낱말을 화려하게 치장하려고 하는 것으로, 쉬운 낱말을 쓰면 어쩐지 좀 창피해서 굳이 어려운 낱말을 찾는 것이다.
‘제일 먼저 떠오른 낱말이 생생하고 상황에 적합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 낱말을 써야 한다.’
수동태는 문장의 주어가 어떤 행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주어는 그저 당하고 있을 뿐이다. ‘수동태는 한사코 피해야 한다.’ 이것은 나만의 주장이 아니다. 《문체 요강》에도 똑같은 충고가 나온다.
소심한 작가들이 '회의는 7시에 개최될 예정입니다(The meeting will be held at 7 o'clock)'라고 쓰는 것은 '이렇게 써놓으면 다들 내가 정말 알고 하는 말이라고 믿겠지'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은 던져버려라! 말도 안 된다! 어깨를 쫙 펴고 턱을 내밀고 그 회의를 당당히 선포하라! ‘회의 시간은 7시입니다(The meeting’s at seven)’라고 써라!
‘나의 첫 키스는 셰이나와 나의 사랑이 시작된 계기로서 나에게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My first kiss will always be recalled by me as how my romance with Shayna was begun).’
맙소사, 이게 무슨 개방귀 같은 소리인가? 이 말을 좀더 간단하게 ─ 그리고 더욱 감미롭고 힘차게 ─ 표현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셰이나와 나의 사랑은 첫 키스로 시작했다. 나는 그 일을 잊을 수가 없다(My romance with Shayna began with our first kiss. I’ll never forget it.).’
좋은 글을 쓰려면 근심과 허위 의식을 벗어던져야 한다. 허위 의식이란 어떤 글은 ‘좋다’, 어떤 글은 ‘나쁘다’라고 규정하는 데서 비롯되는데, 이런 태도도 역시 근심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설명적인 산문의 문단은 대개 단정하고 실용적이다(마땅히 그래야 한다). 이상적인 설명문의 문단은 우선 주제를 밝히는 문장이 나오고 그 문장을 설명하거나 부연하는 문장들이 뒤따르는 형태를 지닌다.
‘문단에는 주제문이 있고 부연 설명이 뒤따른다’는 규칙 때문에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해야 한다. 또한 문단은 작가가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도와주는 좋은 안내자의 구실도 한다. 가벼운 수필에서는 갈팡질팡하는 것도 별로 흠이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게 더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더 진지한 주제를 가지고 좀더 격식을 갖춘 글을 쓸 때에도 두서없이 갈팡질팡하는 것은 몹시 나쁜 버릇이다. 글이란 다듬어진 생각이다.
여러분이 더 많은 소설을 읽고 써보면 문단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막상 글을 쓸 때는 문단을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맺을지를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요령이다.
전보문처럼 간결한 문체가 글의 흐름에 변화를 주고 신선한 느낌을 불어넣는다. 서스펜스 소설가 조너선 켈러맨은 이 테크닉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가령 《적자 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길이가 30피트인 이 배는 희고 매끈한 유리 섬유로 만들었고 내부 장식은 회색이었다. 높다란 돛대들, 거기 묶인 돛. 선체에는 금색 테두리를 두른 검정색 글자로 '사토리'라는 이름이 적혀 있고(The boat was thirty feet of sleek white fiberglass with gray trim. Tall masts, the sails tied. Satori painted on the hull in black script edged with gold.)'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단은 글보다 말에 더 가까운 것이고 그것은 좋은 일이다. 글쓰기는 유혹이다. 좋은 말솜씨도 역시 유혹의 일부분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토록 많은 남녀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곧장 침대로 직행하겠는가?
나는 문장이 아니라 문단이야말로 글쓰기의 기본 단위라고 ─ 거기서부터 의미의 일관성이 시작되고 낱말들이 비로소 단순한 낱말의 수준을 넘어서게 된다고 ─ 주장하고 싶다. 글이 생명을 갖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다면 문단의 단계가 바로 그것이다. 문단이라는 것은 대단히 놀랍고 융통성이 많은 도구이다. 때로는 낱말 하나로 끝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몇 페이지에 걸쳐 길게 이어질 수도 있다. 글을 잘 쓰려면 문단을 잘 이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장단을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목조 건물은 한 번에 한 장씩 널빤지를 붙여가며 만들고, 벽돌 건물은 한 번에 한 장씩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다. 여러분도 한 번에 한 문단씩 써나가면 되는 것인데, 이때 사용하는 건축 재료는 여러분의 어휘력, 그리고 기본적인 문체와 문법에 대한 지식이다. 한 층 한 층 가지런히 쌓아올리고 문짝도 고르게 대패질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건설할 수 있다.
창작론
나는 지금 간단한 두 가지 명제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의 중심부에 접근하려 한다. 첫째, 좋은 글을 쓰려면 기본을 (어휘력, 문법, 그리고 문체의 요소들을) 잘 익히고 연장통의 세 번째 층에 올바른 연장들을 마련해둬야 한다. 둘째, 형편없는 작가가 제법 괜찮은 작가로 변하기란 불가능하고 또 훌륭한 작가가 위대한 작가로 탈바꿈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스스로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고 시의적절한 도움을 받는다면 그저 괜찮은 정도였던 작가도 훌륭한 작가로 거듭날 수 있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슬쩍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여러분이 선택한 모든 책에는 반드시 가르침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종종 좋은 책보다 나쁜 책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한다. ... 형편없는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렇게 쓰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배운다.
한편, 좋은 책은 한창 배움의 길을 걷는 작가들에게 문체와 우아한 서술과 짜임새 있는 플롯을 가르쳐주며, 언제나 생생한 등장 인물들을 창조하고 진실만을 말하라고 가르친다. 가령 《분노의 포도》 같은 소설은 신진 작가들에게 좌절감과 더불어서 유서 깊은 질투심을 심어주기도 한다. '나 같으면 천년을 살아도 이렇게 좋은 작품은 못 쓸거야.'
그러나 이런 감정들은 더욱 열심히 노력하고 더 높은 목표를 갖게 만드는 채찍질이 될 수도 있다. 빼어난 스토리와 빼어난 문장력에 매료되는 것은 ─ 아니, 완전히 압도당하는 것은 ─ 모든 작가의 성장 과정에 필수적이다. 한 번쯤 남의 글을 읽고 매료되지 못한 작가는 자기 글로 남들을 매료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즐거움이 없다면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기가 더 많은 재능을 지니고 있고 재미도 있는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리는 편이 낫다.
가장 바람직한 글쓰기는 영감이 가득한 일종의 놀이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나도 냉정한 태도로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방법은 도저히 손댈 수 없을 만큼 뜨겁고 싱싱할 때 얼른 써버리는 것이다.
음악은 나를 에워싸고 세속적인 세계를 차단해준다. 여러분도 글을 쓸 때는 바깥 세상으로부터 단절되고 싶지 않은가? 당연히 그럴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에 대하여 쓸 것이냐? 이에 대한 대돕도 질문 못지않게 거창하다. 여러분이 쓰고 싶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정말 뭐든지 좋다. 단,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소설의 소임은 거짓의 거미줄로 이루어진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지, 돈벌이를 위해 지적인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친애하는 신사 숙녀 여러분, 그런 방법은 통하지도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쓰되 그 속에 생명을 불어넣고, 삶이나 우정이나 인간 관계나 성이나 일 등에 대하여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들을 섞어넣어 독특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특히 일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일에 대한 내용을 즐겨 읽는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 소설은 장편이든 단편이든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A지점에서 B지점을 거쳐 마침내 Z지점까지 이야기를 이어가는 서술(narration), 독자에게 생생한 현실감을 주는 묘사(description), 그리고 등장 인물들의 말을 통하여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대화(dialogue)가 그것이다.
소설 창작이란 어떤 이야기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과정이라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신념이다. 작가가 할 일은 그 이야기가 성장해갈 장소를 만들어주는 (그리고 물론 그것을 받아적는) 것뿐이다.
소설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떤 세계의 유물이다. 작가가 해야 할 일은 자기 연장통 속의 연장들을 사용하여 각각의 유물을 최대한 온전하게 발굴하는 것이다.
상황이 제일 먼저 나온다. 등장 인물은 ─ 처음에는 밋밋하고 아무런 특징도 없지만 ─ 그다음이다. 마음 속에서 그런 것들이 정해지면 비로소 서술하기 시작한다.
그럴 듯한 어떤 상황만 있으면 플롯 따위는 의미를 잃고 만다. 그래도 나로서는 아쉬울 게 없다. 가장 흥미진진한 상황들은 대개 ‘만약’으로 시작되는 질문으로 표현할 수 있다.
글쓰기에서 정직은 문체의 수많은 결점들을 상쇄시켜주는 미덕이다. 반면에 거짓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큰 결점이다. 거짓말쟁이가 잘 산다는 말은 어김없는 진실이지만 그것은 대체로 그렇다는 뜻일 뿐, 막상 창작이라는 정글 속으로 들어서면 한 번에 한 단어씩 쓸 수밖에 없다. 글을 쓰면서 자기가 알고 느끼는 것들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만다.
묘사는 여러분이 독자에게 어떤 경험을 주고 싶은지를 떠올려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마음 속에 떠오른 모습을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흔히 듣는다.
"이야, 그거 정말 굉장하던데...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작가로 성공하고 싶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알아야 한다. 그것도 독자들이 금방 알아듣고 그 모습을 떠올릴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한다.
묘사는 작가의 상상력에서 시작되어 독자의 상상력으로 끝나야 한다.
독자들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느끼게 만들려면 등장 인물의 겉모습보다 장소와 분위기를 묘사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신체적 묘사를 통하여 인물의 성격을 손쉽게 드러내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러니까 제발 부탁건대, 주인공의 '예리하고 지적인 푸른 눈동자'나 '앞으로 내밀어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턱' 따위는 삼가도록 하라. 여주인공의 '도도해 보이는 광대뼈'도 마찬가지다. 이런 말을 쓰는 것은 한심하고 나태한 짓이다. 그 지긋지긋한 부사들과 다를 게 없으니까.
중요한 것은 스토리, ‘언제나’ 스토리니까. 그러므로 단순히 그러기 쉽다는 이유로 기나긴 묘사에 매달려 하염없이 방황하는 것은 나에게도 여러분에게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할 일이 따로 있으니까.
배경 스토리를 비롯하여 모든 묘사는 꼭 길어야만 좋은 게 아니다.
묘사를 잘하는 비결은 명료한 관찰력과 명료한 글쓰기인데, 여기서 명료한 글쓰기란 신선한 이미지와 쉬운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예시: 하얀 닭, 붉은 손수레, 아이스박스의 양자두, 달콤하고도 시원하여라)
대화는 여러분의 출연진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또한 그들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욱 잘 말해주는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말은 기만적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말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들에게 성격을 드러낼 때가 많다.
좋은 소설의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는 독자에게 어떤 내용을 설명하려 하지 말고 직접 보여주라는 것이다.
대화문을 잘 쓰는 작가들은 대개 남들과 어울리면서 말하고 듣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특히 듣기가 중요한데,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억양이나 리듬이나 사투리나 속어 따위를 주워들어야 하는 것이다.
소설의 다른 요소들이 모두 그렇듯이, 좋은 대화문의 비결도 진실이다.
사실은 나도 우리 어머니와 같은 의견이다. 상소리는 무식하고 천박한 사람들이 쓰는 말이다. 물론 대개의 경우 그렇다는 것이다. 예외도 없지 않은데, 개중에는 상스러우면서도 대단히 독특하고 생동감 있는 명언도 많다. '굶어도 사랑맛 씹맛에 산다', '오줌 누고 좆 볼 틈도 없다', '방귀가 잦으면 똥싸기 십상이다' 등등.
리처드 둘링의 《브레인스톰Brain Storm》에 나오는 아래 글은 욕설이나 상소리를 쓰지 않고도 얼마든지 생생한 묘사가 가능하다는 증거로 부족함이 없다.
"그녀는 그의 몸 위에 걸터앉아 포트를 연결할 채비를 했다. 남성과 여성의 어댑터를 준비시켜 이제부터 입력과 출력이 가능하고 서버와 클라이언트, 매스터와 슬레이브가 서로 왕래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바야흐로 고성능의 생물학적 기계 두 대가 각각의 케이블 모뎀을 결합시켜 서로의 프로세서에 접속할 준비를 마쳤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소설 속에 나오는 말이 점잖으냐 상스러우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 말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들리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자신의 작품이 진실하게 들리기를 바란다면 진실하게 말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입을 다물고 남들이 말하는 것을 듣는 일이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눈여겨보는 일, 그리고 본 것에 대하여 진실을 말하는 일이다.
내 경우에,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등장 인물들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느냐 하는 문제는 순전히 소설을 쓰면서 내가 그들에 대하여 어떤 사실들을 발견하느냐에 달렸다. 바꿔 말하면 그들이 어떻게 발전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
... 좋은 소설은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물 중심이라는 것이다. 다만 단편 소설의 길이보다 길어질 때는 이른바 '성격 묘사'만으로는 부족하다. 궁극적으로는 언제나 스토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등장 인물 속에는 이렇게 자신의 모습도 들어가고, 거기에 덧붙여 여러분이 관찰했던 다른 사람들의 (이를테면 아무도 안 볼 때 코를 후비는 남자의) 성격적 특성도 함께 들어간다. 그리고 멋진 세 번째 요소가 있다. 바로 순수한 상상력이다.
묘사와 대화와 등장 인물을 창조하는 모든 기술도 궁극적으로는 명료하게 보거나 들은 내용을 역시 명료하게 옮겨적는 (그리고 그 불필요하고 지긋지긋한 부사들을 안 쓰는) 일로 귀결된다.
이미 알려진 모든 테크닉은 누구든지 써먹을 수 있다. 이거야말로 황홀한 일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시도해보라. 따분할 만큼 평범해도 상관없고 터무니없을 만큼 특이해도 상관없다. 잘 어울리면 그만이다. 그렇지 않다면 과감하게 버려라. 그때는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버려야 한다. 언젠가 헤밍웨이가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것들을 죽여야 한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의 작품 속에 상징성이 있고 여러분이 그것을 발견했다면 반짝반짝 빛날 때까지 문지르고 세공인이 보석을 다루듯 깎고 다듬어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것이 좋다.
상징성이 그토록 흥미롭고 유용하고 ─ 잘만 쓴다면 ─ 매력적인 이유는 그렇게 뭉뚱그려 요약하는 기능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징성은 비유의 한 가지 형태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벽장 속의 폭탄 덕분에 깨달음을 얻은 뒤로 나는 종종 (어떤 작품의 수정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혹은 초고를 쓰다가 아이디어가 막혔을 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보곤 한다. 이 작품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이 시간에 나는 왜 기타를 치거나 모터사이클을 타지 않고 글을 쓰는가? 애당초 이 고달픈 일을 시작한 이유가 무엇이며 또 어째서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가? 그때마다 답이 금방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는 답이 나오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다시 말하겠다. ‘주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런 것들은 다만 나의 삶과 생각에서 비롯되고,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비롯되고, 또한 남편으로, 아버지로, 작가로, 또 연인으로 살아온 나의 역할에서 비롯된 관심사들일 뿐이다.
처음부터 이런 문제나 주제 의식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은 형편없는 소설의 지름길이다. 좋은 소설은 반드시 스토리에서 출발하여 주제로 나아간다. 주제에서 출발하여 스토리로 나아가는 일은 좀처럼 없다.
문을 닫아걸고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곧장 지면으로 옮겨놓을 때 나는 최대한 빨리 쓰면서도 편안한 마음을 유지한다.
긴박감을 계속 유지하라. 자기 작품을 ‘바깥 세상’의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의견을 듣게 되면 ─ 불신의 말이든 칭찬이든 호의적인 질문이든 간에 ─ 긴박감이 줄어든다.
리스본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66년 봄에도 그런 쪽지를 받았는데, 그 쪽지는 내가 소설을 수정하던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프린터로 인쇄된 편집자의 서명 아래 이런 명언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수정본 = 초고 - 10%. 행운을 빕니다.'
배경 스토리에 관하여 명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a) 과거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 (b) 대개는 별로 흥미롭지 않다는 것이다.
자료 조사는 배경 스토리를 위한 것일 뿐이고, 배경 스토리에서 중요한 낱말은 ‘배경’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서부 펜실베이니아의 경찰 관행에 대한 소설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만 약간의 진실성을 첨가하는 것뿐이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창조적 에너지를 엉뚱한 일에 낭비하는 셈이다. 화석의 형태가 마음 속에 아직 선명할 때 마치 무엇에 쫓기듯 부지런히 글을 써야 하는데, 그 시간에도 자신의 글과 의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될 테니까. 창작 교실에서는 '잠깐, 방금 그 대목의 의미를 설명해봐' 하고 캐묻는 일이 너무 많다.
창작이 곧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때로는 창작이 삶을 되찾는 한 방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것을 깨달은 것은 1999년 여름, 한 남자가 푸른 승합차를 몰고 달려와 나를 죽일 뻔했을 때였다.
인생론: 후기를 대신하여
궁극적으로 글쓰기란 작품을 읽는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아울러 작가 자신의 삶도 풍요롭게 해준다.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 이 책의 일부분은 ─ 어쩌면 너무 많은 부분이 ─ 내가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이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한 내용이다. 나머지는 ─ 이 부분이 가장 쓸모있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 허가증이랄까. 여러분도 할 수 있다는, 여러분도 해야 한다는, 그리고 시작할 용기만 있다면 여러분도 해내게 될 것이라는 나의 장담이다.
글쓰기는 마술과 같다. 창조적인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생명수와도 같다. 이 물은 공짜다. 그러니 마음껏 마셔도 좋다.
부디 실컷 마시고 허전한 속을 채우시기를.
서평
글쓰기, 조금 더 일상적으로는 누군가와 가볍게 나누는 대화 속의 말하기까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항상 표현합니다.
그 말인즉슨, 일상적으로 언어를 만들어내는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잠시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가진 독특한 말투와 표현 방식 등의 말하는 것과 누군가가 가진 독특한 글의 서술 방식 등의 글쓰는 것 모두 각자 그들 나름의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소설가의 아이디어가 아무 상관 없는 것들이 만나면서 나타나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일상 속에서 맞닥뜨리는 모두가 가진 화법 모두 이와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소설가의 아이디어'처럼 각자의 인생에서 읽어온 글귀, 들어온 말귀들이 연결되면서 비슷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은 각자만의 개성이 자리 잡게 됩니다.
어렸을 적 학교에서의 사회 시간을 돌이켜 보면, 21세기의 큰 키워드가 '다원화'라고 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패션, 식단, 문화, 가치관 등 정말 다양한 방향이 뿜어져 나오는 지금을 살면서 언어의 표현 방식 역시 갈수록 다양해지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이 책을 읽어내며, 저자의 삶을 잠시 들여다 보고 제 삶을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연장통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고민합니다.
작가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 책은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왕이면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보는 걸 추천합니다. 제가 책을 대하는 태도가 굉장히 실용주의적이라 처음에는 빠르게 읽어내렸습니다만, 정리를 위해 다시금 찬찬히 들여다 볼 때 더욱 와닿는 것 같습니다.
두서 없는 부족한 글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책 관련 상세 정보는 아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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