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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역사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 - E. H. 카

1 역사가와 사실

역사가의 정확함을 칭찬하는 것은 고르게 건조된 목재를 공사에 사용하거나 잘 혼합된 콘크리트를 사용했다는 사실로 그 건축가를 칭찬하는 것과 똑같다. 이것은 그가 하는 일의 필수 요건일 뿐 그의 본질적인 기능이 아니다.

 

현재에 있어서도 우리가 고대사나 중세사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모든 사실이 손에 닿는 범위 안에 있다는 착각을 갖도록 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알려져 있는 약간의 사실이 모두 역사상의 사실이라는 점에서 역사상의 사실과 과거에 관한 다른 사실과의 사이에 번거로운 구별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중세를 기술한 현대의 역사서 중에서도 중세인들은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적힌 것을 보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었을까?' '정말 그럴까?' 하고 나는 의문을 품게 된다. 또 우리가 중세사의 사실로 아는 것은 거의 모두가 연대기 작가들이 몇 대에 걸쳐 우리를 위해 선택해 준 것인데, 이들 연대기 작가로 말하자면 그 직업상 종교의 이론과 실천에만 정신이 쏠려 있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종교를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종교와 관련된 일은 무엇이나 기록했지만 다른 일은 소홀하게 다루었다.

 

그런데 20세기 초 이탈리아에 횃불이 옮겨져 크로체(이탈리아의 철학자)가 하나의 역사 철학을 제의하게 되었다.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라고 선언했다.

그 의미는 역사란 본래 현재의 시각을 통해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봄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며, 역사가의 주된 임무는 기록이 아니고 평가하는 일이라는 말이다. 역사가가 평가를 하지 않을 경우 기록할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첫째, 역사상의 사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결코 순수하게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즉 언제나 기록자의 마음을 통해 굴절되어 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역사책을 읽을 때 우선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 역사책이 나타내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쓴 역사가여야 될 것이다.

 

최근 10년 동안 영어 사용권 국가들이 쓴 소비에트연방 관계 문헌의 거의 대부분과 또한 소비에트연방이 쓴 영어 사용권 국가 관계의 문헌 거의가 쓸모없는 것은 상대 마음의 움직임을 상상으로 이해하는 일의 근사치에도 이르지 못한 결과로, 상대의 말이나 행동이 항상 악의에 차고 비상식적인 위선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역사가가 자신이 다루는 사람들의 마음과 접촉할 수 없는 경우 역사는 기록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과거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도 아니고, 현재를 납득하는 열쇠로서 과거를 정복하고 이행하는 것이다.

 

읽어 가면서 써 놓은 것을 보충하고 지우고 다시 쓰고 지우는 것이다. 또한 읽는 것은 씀으로써 인도되고 방향이 제시되며 풍부해진다. 써 나갈수록 내가 찾고 있는 것을 한층 더 깊이 알게 되며 내가 발견한 것의 의미나 중요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내가 확신하는 바에 의하면 역사가라고 불릴 만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경제학자가 '투입' 및 '산출'이라고 부르는 두 가지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는데, 실제로 이들은 하나의 과정의 두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이 이들을 떼어 놓으려 하거나 한쪽을 다른 쪽 위에 놓으려 한다면 두 가지 이단설 중의 하나에 빠지게 된다. 의미나 중요성도 없는 풀과 가위의 역사를 쓴다던가, 아니면 선전문이나 역사소설을 써서 역사와는 무관한 어떤 종류의 문서를 장식하기 위해 다만 과거의 사실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역사가 직면한 곤경은 인간 본성의 한 반영이다. 갓 태어난 유아기나 아주 고령인 경우는 다르겠으나 인간은 결코 환경에 송두리째 말려든 것도 아니며 환경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도 역시 아니다. 반면에 인간은 환경에서 완전히 독립되지도 않았으며 그 절대적인 주인 또한 아니다. 인간과 환경의 관계는 역사가와 주제와의 관계이다.

 

또한 역사가는 현재의 한 부분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에 그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의 상호 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 필요한 것이다. 사실을 갖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존재이며 따라서 열매도 맺지 못한다.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생명도 의미도 없다.

여기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최초의 내 대답을 하기로 한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2 사회와 개인

요컨대 역사가는 하나의 개인이다. 다른 개인과 마찬가지로 그도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며 그가 속한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사회의 대변인이다. 그런 자격으로 역사가는 역사적 과거의 진실을 향해 접근해 간다.

 

위대한 역사는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시각이 현재의 제반 문제에 대한 통찰에 의해 빛을 받을 때에만 올바로 씌어진다.

 

지금의 내 의도는 다만 역사가의 연구가 그가 연구 활동을 하고 있는 그 사회를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려는 것뿐이다. 비단 사건만이 흐름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 역시 그 흐름 속에 있다. 역사에 관한 저작을 읽을 때 표지에서 저자의 이름을 찾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간행이나 집필 연대를 찾아야 하며, 때로는 그편이 유익할 때도 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철학자의 말이 옳다면 한 역사가가 두 권의 책을 쓸 수 없다는 말 역시 진실이고 이유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의 사회적·역사적 상황을 뛰어넘는 인간의 능력은 자신이 거기에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가를 인정하는 감수성 여하에 좌우되는 것으로 느껴진다.

나는 첫 번째 강의에서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 역사가를 연구하라'고 말했다. 이제는 '역사가를 연구하기보다는 우선 역사가의 역사적·사회적 환경을 연구하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이런 이중적 안목으로 역사가를 중요시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그보다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견해에 대해서 무조건 없이 동의하고 싶다.

<역사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고 막대한 부 역시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전쟁도 하지 않는다. 모든 일을 행하고 소유하고 싸우는 것은 다만 인간, 실제로 살아 있는 인간이다.>

 

존스가 선뜻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은 이유로 존스와 같은 세대의 수천 명이 결혼을 망설이고 결혼율의 실질적인 저하를 초래하지 않는 한, 역사가는 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결혼율이 저하되는 경우 이 이유는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된다.

또 운동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다는 상투어에 마주치더라도 당황할 필요가 없다. 모든 효과적인 운동에는 반드시 소수의 지도자와 다수의 추종자들이 있게 마련인데, 이것은 다수의 그들이 운동에 있어서 그 성공에 따르는 필수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역사에서는 수가 중요하다.

 

지금에 와서도 나는 다음에 제시하는 헤겔의 고전적인 서술이 다시 손댈 필요 없이 완벽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한 시대의 위인이란 그의 시대에 대한 의지를 표현하고, 그의 시대를 향해 그 시대가 원하는 바를 알려 주고, 그 의지를 실행하는 인간이다. 그의 행위는 그 시대의 정수이며 본질이다. 그는 자기 시대를 실험하는 자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인이란 역사적 과정의 산물인 동시에 생산자인 탁월한 개인, 그리고 세계의 모습과 인간의 사상을 변화시키려는 사회 세력의 대표자인 동시에 창조자인 뛰어난 개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라는 이 말의 두 가지 의미 - 역사가가 행하는 연구라는 뜻에서나 역사가가 연구하는 과거의 사실이라는 뜻에서 - 의 어느 쪽으로 보건 하나의 사회적인 과정이며 개인은 사회적인 존재로서 그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개인과 사회에 있어서의 가상적인 대립은 우리의 사고를 혼란시키려는 함정에 지나지 않는다.

 


 

3 역사와 과학과 도덕

<경험적인 자료, 곧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에 호소하여 우리는 원리에 대한 증거를 얻고 이와 같은 원리를 기초로 경험적 자료를 선택하고 분석하고 해석한다.>

'순환적'이라는 표현보다는 '상호적'이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동일한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리와 사실과의 사이, 이론과 실제 사이의 상호작용 과정을 통해 새로운 발견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고는 관찰에 그 기초를 두고 어느 정도의 전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으며, 이와 같은 전제는 과학적인 사고를 가능하도록 만드는 동시에 다시 과학적 사고의 조명을 받아 수정되어 나간다.

 

오늘날에 와서는 과학자는 물론 역사가들도 하나의 단편적인 가설에서 또 하나의 단편적인 가설로 점차 진행되어 가며, 자신의 해석을 매개로 하여 사실을 분리하며 해석을 사실에 의해 검토하려는 보다 겸허한 희망을 갖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과학자의 연구 방법과 역사가의 연구 방법이 별로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기번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한 개신교의 공인과 이슬람교의 발생을 함께 혁명이라고 기술했을 때, 그는 두 독자적인 사건을 일반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 역사가가 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 혁명에 관해 논할 때 그와 마찬가지 행동을 하고 있다. 역사가가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 일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

 

그(마르크스)가 편지 가운데서 이 문제를 올바로 제시해 놓은 하나의 문구를 요약해서 인용하도록 하겠다.

<놀랄 만큼 비슷한 사건이 다른 역사적 환경 속에서 발생한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사건 하나하나의 진행을 따로따로 연구한 연후에 그것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쉽게 발견된다. 하지만 역사 위에 초연하게 서는 것을 최대의 덕목으로 삼는 역사철학의 이론을 열쇠로 사용해서는 절대로 이 같은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과의 관계를 취급하는 것이 역사이다. 우리가 역사가로서 사실과 해석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듯이, 특수적인 사항과 일반적인 사항을 분리시킬 수 없으며 또한 한쪽을 다른 쪽 위에 올려 둘 수도 없다.

 

그러므로 역사가가 사형선고 내리기를 좋아하는 재판관이라고 하는 생각을 버리도록 하자. 그리고 또한 과거의 개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사건, 제도, 정책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보다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좀 더 유익한 문제로 눈을 돌려보도록 하자. 이것은 역사가에게는 매우 중요한 판단이다.

 

인쇄된 부분은 자유와 평등, 정의와 민주주의 같은 추상적인 말로 되어 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범주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구에게 주려고 하는가, 우리가 어떤 사람을 평등한 동료로 인정하는가, 그것은 어느 한계까지인가를 다른 부분에 기입하지 않는 한 그 수표는 하등의 가치가 없는 것과 같다.

우리가 그때그때 수표에 기입하는 방식이 바로 역사의 문제이다. 추상적인 도덕적 관념에 특수한 역사적 내용이 부여되는 과정이 역사적 과정이다. 사실상 우리들의 도덕적인 판단은 그 자체가 역사의 창조물인 개념적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오늘날 도덕적인 문제에 관해 흔히 볼 수 있는 국제적 논쟁의 형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에워싼 청구권 싸움이다.

자유나 민주주의라는 관념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그러나 여기에 담겨지는 내용은 시대와 장소가 바뀜에 따라 역사를 통해 변화되어 왔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관념을 사용하는 실천적인 문제는 역사적인 견해를 통해 비로소 이해될 수 있고 논의도 진행될 수 있다.

 

역사가들이 도덕적 판단을 표현하려 할 때 '선'과 '악'이라는 지극히 비타협적인 절대적인 말보다는 '진보적' 또는 '반동적'이라는 비교의 성질을 가진 용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것은 갖가지의 사회나 역사적 현상을 어떤 절대적인 기준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그 상호 관계 아래서 규정하려는 시도이다.

 

연구의 목적은 동일하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물리학자, 지질학자, 심리학자, 역사가의 전제와 방법은 세부적으로는 현저하게 다르다. 그래서 나는 역사가들이 보다 과학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더욱 충실하게 자연과학의 방법에 따라야만 된다는 명제를 수용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렇지만 역사가와 자연과학자는 설명을 구하는 근본 목적에서나 혹은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답변하는 근본적인 절차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역사가는 다른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왜?'라고 질문하는 동물이다.

 


 

4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관한 논리적 딜레마는 실제 생활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의 행동은 자유롭고, 어떤 사람의 행동은 결정지어져 있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인간의 행위는 어떤 견지에서 보는가에 따라 자유롭기도 하고 이미 결정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도 실제적인 문제는 또 한 번 달라진다.

 

그(몽테스키외)는 <어떤 전쟁의 우연한 결과와 같은 특수한 원인이 한 국가를 멸망시켰을 경우에는, 불과 한 번의 전쟁으로 국가의 몰락을 재촉할 만한 일반적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상당한 곤경에 처해있다. 마르크스는 이 문제에 대해 단 한 번 쓴 일이 있는데, 그것도 편지를 통해서였다.

<만일 세계사에 우연이 개재할 여지가 없었다면 세계사는 매우 신비스러운 성격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 우연 자체는 발전의 일반적인 경향의 한 부분이 되고, 다른 형태의 우연에 의해 메워진다. 그렇지만 발전의 촉진과 지연은 이러한 '우발적' 사건에 의존하고 우발적 사건에는 처음에 운동의 선두에 선 사람들의 '우연한' 성격이 포함된다.>

 

역사에서도 우리들은 합리적인 원인과 우연적인 원인을 구분한다. 합리적인 원인은 다른 나라, 다른 시대, 다른 조건에도 잠재적으로 적용 가능하기 때문에 유효한 일반화에 도달하고 아울러 거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합리적 원인은 우리들의 이해력을 확대 심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반면 우연적 원인은 일반화시킬 수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특수한 것이므로 아무런 교훈도 주지 않고 어떠한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주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에서 인과관계에 대한 논의의 열쇠가 되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목적이라는 개념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가치판단이 내포된다.

 

나는 지금까지 '과거와 현재'라는 편리한 용어를 사용해 왔다. 그렇지만 다 알다시피 현재란 과거와 미래를 갈라놓은 가공의 선이라고 하는 관념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이미 현재와는 다른 시간적 차원을 몰래 논의에 도입시켰던 것이다.

과거나 미래도 모두 동일한 시간 선상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관심과 미래에 대한 관심이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구분하는 선은 사람들이 현재에만 살지 않고 의식적으로 과거와 미래에 관심을 갖게 될 때에 무너진다. 역사는 전통의 계승과 더불어 시작되며, 전통은 과거의 습관과 교훈을 미래에 전달하는 것을 뜻한다.

 

훌륭한 역사가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미래라는 것을 깊이 느끼는 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역사가들은 '왜?'라는 문제 외에도 '어디로?'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5 진보로서의 역사

그러나 현대인의 사고는 그동안 여러 세대의 경험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경험에 결부시킴으로써 사고의 유효성이 몇 배로 증대하였다. 획득형질의 전승은 생물학자들이 거부하는 것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사회적 진보의 기초를 형성한다. 역사란 획득된 기술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하여 이루어진 진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에게는 진보의 종착점은 이미 진화된 것이 아니다. 진보의 종착점은 아직도 아득히 먼 곳에 있으며 그 지표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때에만 비로소 시야에 들어온다. 그렇다고 해서 그 중요성이 감소되지는 않는다.

나침반은 진정으로 귀중하고 필수적인 길잡이이다. 하지만 나침반이 가야 할 길을 밝혀 주는 지도는 아니다. 역사의 내용은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는 실현될 수 없다.

 

내가 만일 실제로 역사 법칙을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면, 어떤 때에 문명의 전진을 위해 지도적인 역할을 한 집단은 다음 시기에는 같은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는 법칙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집단은 그전 시대의 전통, 관심, 이데올로기가 매우 깊숙이 배어 있을 것이기에 다음 시대의 요구나 조건에 부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집단에 대해서는 몰락의 시대로 보이는 것이 다른 집단에게는 새로운 전진의 시작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진보의 본질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예를 들어 시민의 권리를 만인에게 확대하기 위해 싸우고, 형사소송 절차를 개혁하고, 인종이나 빈부의 불평등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일의 실현만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보'를 달성하겠다거나 어떤 역사의 '법칙'이나 '가설'을 실현하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의 행위에 진보의 가설을 적용하고 그 행위를 진보라고 해석하는 것은 역사가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진보의 개념이 무효화되지는 않는다.

 

진보란 추상적인 용어이다. 인류가 추구하는 구체적인 목적은 때에 따라 역사의 과정 가운데 생성되는 것이지, 역사 밖의 어떤 원천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인간의 완성 가능성이나 미래에 지상의 낙원이 도래한다는 믿음에 기대감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점에 관한 한 나는 역사에서 완성이라는 것은 실현될 수 없다고 설파하는 신학자와 신비주의자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그것을 향해 전진한 후에야 비로소 분명해지고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에서만 증명될 수 있는 목표를 향한 무한한 진보, 다시 말해 우리가 설정할 수 있거나 생각할 수 있는 한계점이 없는 진보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역사의 사실은 역사가가 인정하는 중요성에 따라서 역사상의 사실이 되므로 순수하게 객관적일 수는 없다. 역사에 있어서의 객관성 - 우리가 이 편리한 용어를 계속 사용한다면 - 은 사실상의 객관성이 아니라 다만 관계의 객관성, 즉 사실과 해석, 과거와 현재 및 미래와의 사이에 있는 관계의 객관성이다.

 

현재의 온갖 사고는 필연적으로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의 절대자는 아직 불완전하고 생성 과정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전진해 나가는 미래 속에 있으면서 우리가 그것을 향해 나아갈 때에만 비로소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여 우리가 전진함에 따라 그 빛에 비추어서 점차로 과거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과거를 해석하는 열쇠는 오직 미래만이 마련해 줄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만 우리들은 역사에서의 궁극적인 객관성을 말할 수 있다. 과거가 미래를 조명하고 미래가 과거를 조명하는 것이 바로 역사의 정당화인 동시에 역사에 대한 설명이다.

 

역사에서의 객관성이라는 것은 우리들 눈앞에 놓인 어떤 고정불변의 판단 기준에 의존한 것이 아니고 또 의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미래에 놓여 있는 기준 그리고 역사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발전하는 기준에만 의거하고 존재할 수 있다는 나의 주장을 설명하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 사이의 일관된 관계를 수립할 때 비로소 역사는 의미와 객관성을 획득한다.

 

사실로부터 가치를 끄집어낼 수 없다는 명제는 어떻게 보더라도 일면적이고 잘못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면 이 명제를 거꾸로 생각해 보자.

가치로부터 사실을 끄집어낼 수 없다는 명제 역시 반쯤은 사실이지만,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있기 때문에 조건이 필요해진다. 사실을 알고자 할 때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나 우리가 얻게 되는 해답은 우리의 가치 체계를 그 배경으로 한다.

환경의 여러 사실에 우리가 어떤 상(像)을 부여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 즉 우리가 사실에 접근할 때 매개로 사용하는 범주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 상은 우리가 고려해야 될 중요한 사실이다.

가치는 사실 속으로 들어가 사실의 본질적인 부분을 이룬다. 우리의 가치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부분이다. 우리가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도, 환경을 우리에게 적응시키는 능력도, 환경을 지배하여 역사를 진보의 기록으로 만드는 능력도 모두가 우리의 가치를 통해서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과 환경의 투쟁을 극적으로 과장하여 사실과 가치를 대립시키거나 분리시키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역사에서의 진보는 사실과 가치의 상호 의존 작용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미래를 향해 진보해 나가는 능력에 확신을 잃어버린 사회는 곧 과거에 이룩한 스스로의 진보에 대해서도 빨리 무관심해질 것이다.

 


 

6 넓어지는 지평선

현대라는 역사적 시기로의 전환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때에는 이미 지성의 일차적인 기능은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지배하는 객관적 법칙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적인 행위에 의하여 사회와 그 구성원 개인을 개조하는 일이 되었다.

 

지금은 자기의식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역사가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고 또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말하는 이른바 현대 세계로의 전환 - 이성의 기능 및 힘이 새로운 영역으로 확대되는 것 - 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20세기의 세계가 통과하고 있는 혁명적 변화의 일부분이다.

 

그렇지만 자유방임주의 경제로부터 통제경제 - 자본주의적 통제경제든 사회주의 경제든, 다시 말해 대규모의 개인적인 자본가에 의해 통제되든 국가에 의해 통제되든 - 로 전환됨에 따라 이러한 환상은 종식되고 말았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이 우리 경제 과정을 결정해 준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오늘날 석유나 비누의 가격이 수요와 공급의 객관적 법칙에 따라 변동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 각계각층의 교육자들은 특정형의 사회를 만드는 일과 이러한 사회에 적합한 태도, 충성, 의견을 젊은 세대에게 주입하는 일에 더욱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교육정책은 합리적으로 계획된 모든 사회정책상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 있다. 사회 속의 인간에게 적용되는 이성의 핵심적인 기능은 이제 탐구라는 면을 넘어 변경시키는 일에 이르고 있다. 합리적 과정을 적용하여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현상의 통제를 진행시키는 인간의 힘에 대한 의식이 이와 같이 고양된 것은 20세기 혁명의 중요한 측면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우리 러시아인들은 아직도 원시적인 인간을 상대해야만 된다. 우리로서는 우리가 구할 수 있는 비행사의 유형에 비행기를 맞추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양성하느냐에 따라 자재의 기술적인 발전도 완성될 것이다. 두 요소는 상호 간에 제약하고 있다. 복잡한 기계 속에다 원시적인 인간을 밀어 넣을 수는 없다."

 

나는 역사가로서 후자의 현상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생산의 합리화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 곧 인간의 합리화를 뜻한다.

 

과학이든 역사든 사회든, 인간사의 진보는 오직 인간이 현존 제도의 단편적 개선을 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성의 이름으로 현존 제도에 대해, 공공연하든 은밀하든 간에 그 현존 제도의 기초를 형성하는 전제에 대해 근본적 도전을 시도하는 대담한 각오를 통해 이룩된다.

 

누가 뭐라 해도 나 자신은 전과 다름없이 낙관주의자이다. 루이스 네이미어 경이 정강이나 이상을 피하라고 경고할 때, 오크숏 교수가 나에게 우리들은 어디론가 특별한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아무도 보트를 흔들지 못하도록 조심하는 일이라고 말할 때, 포퍼 교수가 단편적인 공학을 이용하여 저 사랑스럽지만 낡은 T형 포드를 언제까지나 몰고 다니기를 바랄 때, 트레버로퍼 교수가 절규하는 급진파의 콧등을 때릴 때, 모리슨 교수가 건전한 보수주의 정신으로 쓰인 역사를 옹호할 때, 나는 격동하는 세계 그리고 진통에 괴로워하는 세계를 바라보며 어느 위대한 과학자가 남긴 오래된 말을 빌려 대답할 것이다.

"그래도 역시 그것(지구)은 움직인다."

 


서평

저는 역사를 좋아합니다. 어렸을 적 삼국지 전집을 열댓 번씩 읽었고, 역사라면 만화책이든 소설책이든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국정 교과서를 통해 국사라는 과목에 대해 배웠고, 세계사라는 과목을 통해 제가 접했던 역사들을 찬찬히 되짚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일한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속에서 제 나름대로 옳음의 기준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만큼 배움이 부족했던 탓도 있지만, 제 사고의 관점이 제대로 자리잡지 않았던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독자가 어떠한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볼 것인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역사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자리잡으면, 현재를 바라보는 나의 눈 역시 변화하게 됩니다.

역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잘 이해하기 위해 한 번쯤은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자세한 책 관련 정보는 하단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공감과 댓글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국내도서
저자 : 에드워드 H. 카(Edward Hallett Carr) / 김택현역
출판 : 까치(까치글방) 201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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